3. 포기할 수 없는 도전
그리고 감사한 분들
손발이 떨렸다.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정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구나. 다시 바로 데카틀론 안으로 들어가서 이 상황을 알렸고 그들은 나 대신 경찰서에 전화해줬다. 전화상으로 경찰은 내가 경찰서에 가야 한다며 여기서 가까운 경찰서 두 군데를 알려줬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둘 중 더 가까운 경찰서로 달렸다. 도착하여 건물 정문이 잠겨있음을 확인할 때 경찰관 한 명이 문을 열며 말 한 마디 대뜸 던지고 들어갔다. "끝났다." 인터폰 벨을 눌러보았으나 그 너머에 있는 경찰관도 "끝났다."라고만 말하고 인터폰을 끊으려 하였다.
아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야간에도 근무하는 경찰서나 그런 지점은 당연히 있을 것인데 끝났으면 어떻게 하라는 다른 대안을 줄 관심도 없다는 것인가?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경찰관이 나보고 여기로 오라고 했다.”라고 재차 반복해 외쳐 댔다. 그제서야 잠겨있는 문 안에 있던 경찰관은 밖으로 나와 내 얘기를 들었다. 결국 조금 전 데카틀론에서 들은 나머지 다른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꼬우면 출세해야지 다른 곳에 가면 해결해 주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지고 나왔던 후드자켓은 자전거와 사라져 점점 차가워지는 몸을 이끌고 다음 경찰서에 갔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경찰관의 안내에 따라 간단한 보고서 작성을 마쳤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증명서를 받고 이제 끝났으니 가보란다.
“혹시 내 자전거가 무슨 색깔인지 안 궁금해?” “응.”
그렇다. 난 여태까지 허황된 소망과 춥고 배고픈 몸을 이끌고 축제에 흥분한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이 곳에 왔던 것이다. 자전거 색깔조차 궁금하지 않다는 경찰관에게 “내 자전거 사진 줄까”라고 재차 물어본 난 참 미련했다.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올린과 친구들은 곧 집에서 나올 참이었고, 난 와이파이가 있는 따뜻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릴 셈으로 두오모 광장 앞 버거킹으로 향했다.
날씨는 더욱 서늘했고 점차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버거킹에서 기다리다 심지어 잠까지 들었던 나는 친구들을 아직 만나기 전에 결국 집에 혼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낮에만 해도 밀라노와 난 함께 들떴는데, 내 출전을 경축하는 술자리를 잔뜩 기대했는데, 난 밀라노로부터 등을 돌렸다. 사실 술을 좋아한다. 덴마크에서 김치 한 번도, 옷 한 벌도 안 사 먹고, 안 사 입은 대신, 덴마크에서 일을 갖고 수입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술은 사 마셨다. 친구들과 술을 즐기는 건 한국 친구들과나 외국 친구들과나 다를 게 없이 즐겁다. 경찰서에서 보고서 작성을 다 마친 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 여겼지만 그 엄청난 피로는 정말 대단했다. 집에 돌아와서 침낭을 피자마자 바로 그 위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즉 모험 6일, 비록 자전거가 도둑맞았지만 올린의 생활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날 까지만 올린 집에서 묵고 월요일인 모험 7일엔 올린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비록 분해도 자전거와 샀던 모든 장비를 다시 사야 했다.
이젠 정말 예산 문제였다. 단순히 아까운 호화 호텔이 싫어 카우치서핑을 찾았던 것과 달리 이제 아까지 않으면 여행을 끝낼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무료 숙박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밀라노 한인센터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을 하여 사정을 알렸고 한인센터에서 밀라노 한인교회 이리노 목사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난 안전한 곳에 지붕만 있으면 매트리스와 침낭 깔고 잘 수 있다고 말씀 드렸고 목사님께서는 다음날 오라고 하셨다.
모험 7일, 한 상자 가득 들은 짐, 뚱뚱해진 배낭과 이키아 가방 하나 들고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가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밀라노 한인교회 이리노 목사님 이 목사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나가시고 한영진 집사님께서 날 맞이해 주셨다. 잠시 대화 끝에 한 집사님께서는 자기 집 안에서 잠자리를 마련해 줄 상황이 안되고 그렇다고 찬 바닥에서 자는 것도 안쓰럽기 때문에 차라리 따신 한인민박에서 아침밥 든든히 먹으라며 민박집에서 며칠 묵을 치의 돈을 건네주셨다.
이렇게 큰 돈을 받고자 온 것은 아니고 울타리와 지붕만 있으면 되는데, 결국 한 집사님의 언변에 못 이겨 봉투를 받고 교회를 나왔다. 한 집사님은 유쾌하신 분이셨다. 근처 바에 들어가 주스와 이탈리아 식의 간소한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난 다시 처음 이틀을 지낸 민박집을 향했지만 이 돈이라도 아껴 써야 할 것 같다. 이번의 검색어는 '밀라노 한인 학생회'이다.
역시 구글신 아니 던가. 우리 구글신께서는 밀라노 한인 학생들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담긴 명단을 찾아주었다. 그 중에 첫 번째 남자이름의 학생인 김명식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인정이 많다. 흔쾌히 약속 장소를 정했고 이날은 김명식씨와 함께 잤다.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 늦게 퇴근하는 정말 바쁜 박사 유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날 즈음에 집 하수구가 막혀 여러모로 손님을 들이기가 불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음날은 다른 잘 곳을 찾기로 했다. 이렇게 잠깐 잠깐 머무르는 방법으로는 숙박비는 아껴도 시간낭비가 심했다.
어제 오늘 음식을 잘 해먹지도 못해 여러모로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다. 벌써 모험 8일인데, 차라리 호스텔 하나 잡아 다시 자전거와 모든 장비를 준비하고 빨리 출발해 버릴까…. 오늘 하루 더 찾아보자. 밀라노로도 카이스트에서 교환학생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이스트 국제협렵팀에 내 사정에 대한 기술과 함께 교환학생 온 학생들 연락처를 요구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다음엔 밀라노 총영사관에 전화했다. 총영사관의 한미영 행정원은 총영사관이 직접적으로 도와줄 적당한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고 날 위로해주며 총영사관 당직 전화번호, 민박집 전화번호와 함께 밀라노 한국순교자천주교회의 김지현 요한 신부님 연락처를 알려줬다. 좀더 힘을 내자. 김 신부님께 전화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잠시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제발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로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한 신자부부네 집에서 준비가 끝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어머니와 화상통화 아, 드디어 안정된 거처를 구했다! 그 부부는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였다. 바로 전화를 걸어 감사하다며, 지금 운영하는 한국식품점 가게에 찾아가 직접 인사 드리겠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 부모님께 전화할 차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먼저 페이스북 영상통화로 전화를 거셨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어머니께서는 왠지 내가 페이스북에 있을 것 같아 오래간만에 들어와봤고 페이스북에 영상통화 기능이 있길래 한 번 클릭해 본 것이라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오래간만에 아들과 영상통화하여 그저 행복해 하셨다. 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도둑 맞은 것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으셨다. 그래 이것도 어머니 말씀대로 큰 경험이다. 가족처럼 챙겨주신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 돈 몇 푼어치 잃어버린 게 뭐 대수이랴. 난 우리 어머니로부터 ‘전화위복’을 배웠다. 10살이던 어느 날 학교 숙제로 종이로 된 자동차를 만들었다. 실수로 어머니께서 밟으셔서 자동차를 망쳤고 난 어린 마음에 울었다. 어머니께선 날 달래며 같이 다시 만들자고 설득하셨고 우리는 당연히 더 멋진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때 어머니께서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한 마디를 말씀해 주셨다. '전화위복' 이 말은 해가 지날수록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점점 더 파고 들어왔다.
모든 일은 결국 다 잘 될 거야.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날 위해서 돌아간다고 굳게 믿는다. 다만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날 위해서'는 돌아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화위복'은 더욱 증명만 될 뿐이었다. 후회할 법한 일이 생겨도 그것은 더 좋은 것을 부르는 나비효과였다.
삶에 있어서 후회할 필요는 전혀 없고, 다시 행복해 지면 된다. 왜냐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걸 아니깐. 영화 선리기연의 손오공 역 주성치가 말했다.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역시 후회하지 않으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나에게 일어난 도난 사고도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고 더 좋은 결과를 유래하는 사건이다. 언제나 즐거운 앞날이 기대된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 아저씨는 남는 방 두 개로 가끔 민박집처럼 운영하였고 신부님께서는 내 숙박에 대해 금전적 지원을 해주시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흘 머무르는 동안 아주머니 아저씨께서는 날 가족처럼 매우 따뜻하게 챙겨주셨다. 모험 12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밀라노를 떠나자. 김 신부님은 일이 있으셔서 직접 찾아 뵙진 못하여 전화로만 인사 드렸고, 이 목사님은 찾아 뵙고 인사 드렸다. 다시 모든 준비를 갖춘 새 자전거 두 분 다 좋은 말씀 전해 주시며 앞 길의 편안을 빌어주셨고, 난 드디어 첫 야영지를 찾아 나섰다.
적당한 야영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람의 통행이 없고 안전한 곳을 과연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몇 시간 헤맨 끝에 밀라노 시 외곽의 축구장 사이 작은 잔디밭(좌표 45.48915, 9.047371)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과연 안전할까, 누가 와서 야영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모험에 기대와 흥분을 안은 채 별일 없길 바라며 침낭 안에 몸을 맡겼다.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 eurojournal@eknew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