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벽 두 시인데도 텐트 칠 곳은 찾지 못하고
제노바는 6~70여 만 명의 큰 도시이고 그만큼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구경 거리도 많을 것이고 지금 여기 제노바가 아니고서는 다음 큰 도시까지 한동안 방수되는 앞 페니어를 파는 곳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밀라노의 안 좋은 추억 때문인지 별로 제노바에 남고 싶지 않다.
사실 또한 나의 최대 관심사는 그토록 대단하다는 친퀘테레에 오로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잠시 멈춰 보고 즐길 것들이 많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마치 다음 정착역이 친퀘테레인라고 설정된 기차처럼 단세포적 사고로 친퀘테레 이전의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차안대를 씌운 경주마처럼 단순히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밤이 되어 텐트 칠 곳을 찾을 때도 혹시나 하여 후보지를 눈 여겨 놓으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절대 후진은 없다. 언젠가 앞에서 찾을 것이란 희망으로 계속 나아간다. 사실 가뜩이나 힘든데, 왔던 길 되돌아가는 것도 참 싫다.
제노바를 지나 해안의 야경.
어둡고 고요한 모래사장이 보이고 나란히 정렬된 작은 보트들이 보인다. 해안가를 따라 저 멀리까지 반짝거리는 야경은 마치 하늘의 별들이 땅에 내려 앉은 것 같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느긋이 산책하거나 조깅하는 몇몇 사람들처럼 여러 식당과 피자가게, 바(bar)가 즐비한 제노바의 해안가 도로를 느긋이 달리니 마음이 여유롭다. 바닷가를 따라 희미한 파도소리에 한들거리는 저 먼 붉은 가로등 빛들 넘어 어딘가에 나의 낭만도 있을 것 같다.
이탈리아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없는 대신 24시간 무인 자판기 판매점이 있다.
그런 조용한 해안가로 자전거를 유유히 한동안 몰다가 한가로이 대화 나누는 세 명의 여학생을 발견했다. 왠지 다가가서 일부로 길을 물어봐야 할 것 같다.
텐트 칠만한 장소 아냐고 물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우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출생지도 제노바고, 주세페 가리발디가 여러 국가로 나눠져있던 이탈리아를 통합하기 위한 여정을 출발한 곳도 제노바라는 사실과 모든 이탈리아 국민이 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한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런데 세 여자 중 한 명이 유난히 빗질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볼터치 화장을 한다. 설마 내게 잘 보이려고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항상 내게 해주는 의미 깊은 말 한 마디가 있다. 착각은 자유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남자친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부끄러웠다. 역시 난 착각을 잘한다.
그들은 텐트 칠 만한 두 장소를 추천해줬다. 하나는 다시 되돌아 가야 하고 하나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역시 되돌아가기 싫기 때문에 전방의 것을 찾아가기로 했다. 한 참의 대화 끝에 이들과 헤어진 시각은 바로 새벽 1시였다.
이탈리아와 제노바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해준 젊은 친구들
이곳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가 있는 작은 공원이다. 한 쪽 면은 바닷가와 거의 맞닿아 있다.
상당히 피곤하여 여기 도착하자마자 바로 텐트치고 싶지만 작은 공원이기 때문에 어쩌면 바깥 길에서 텐트가 보일 수 있고 게다가 놀이 기구도 있어 어린아이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문제가 생길까봐 여기 텐트를 치기 걱정스럽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 공원보다 적절한 곳은 없고 벌써 시간은 새벽 2시이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 그나마 나무 사이에 최대한 가려질 수 있도록 텐트를 쳤다(좌표 44.383686,9.019392).
공원 구석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텐트
전날 71km나 달린데다 새벽 2시 넘어 밥 해먹고 잤고, 매우 피곤했기 때문에 모험 17일인 이튿날 점심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텐트 문을 여니 앞엔 푸른 바다가 끝없이 보이고 뒤에는 어린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가 들린다. 주변의 보호자들의 이 정체 모를 텐트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아이들이 신기한 듯 안에 누가 있는지 보러 오기도 하고 놀면서 텐트 앞도 지나가기도 했지만 보호자들은 특별한 위험의식이 없는 것 같다.
그러던 와중 텐트 앞 작은 길로 경찰차가 지나가더니 그 옆 주차공간에 주차를 했다. 분명 이 텐트를 봤을 것이고 주차 한 이유는 나에게 오기 위함이리라. 텐트 천막 뒤에 숨어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는 나약한 피고인처럼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집중했다
. …… 왜 안 오는 것일까. 텐트 문 사이로 빼꼼 내다 보니 경찰관들은 차 안에서 단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경찰들 참 관대하기도 하다!
전날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밥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 밥을 조금 태웠다.
충분한 휴식 후 거의 저녁이 되어갈 무렵 다시 출발했다. 해안가를 따라 나있는 국도를 따라 작은 도시들이 계속 이어진다. 비록 해안가라지만 도로는 수면 가까이서 평탄하지 않고 계속 언덕을 고불고불 오르내리락 한다.
이제 밤이 되고 역시나 텐트 칠 곳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산간지역이라 부지가 부족해서 그런지 공공 주차장이나 공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집들과 사유지, 사유주차장만 보인다. 도저히 텐트 칠 만한 곳이 없다. 밤 12시가 넘어가고 1시가 넘어가고 이제 또 새벽 2시가 되었다.
도저히 피곤해서 안되겠다. 차라리 이른 밤에 적당한 사유 주차장에서 텐트치고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 텐트를 치우면 됐을 텐데 이제 그러기도 힘들다. 잠을 적당히 안 자면 내일 움직이기 힘들다. 피곤한 몸과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천천히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데 기차역 표지판을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차라리 기차역 플랫폼에서라도 자면 될 것이다. 표지판은 수면으로부터 꽤나 높은 국도에서 바다 쪽으로 심한 경사로 아래쪽을 가리킨다. 만약 잘 곳이 마땅치 않으면 이 길고 긴 가파른 경사로를 다시 올라와야 하지만 내려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희망으로 내려왔다.
기차역에 오기 전에 라팔로(Rapallo)에서 밤 12:30분 쯤에 들른 바(Bar). 여기서 여행시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전자제품의 충전이다. 가장 저렴한 토스트를 먹으며 각종 배터리 충전을 했다.
건물 바닥보다 높게 지나가는 언덕 위 도로로 난 다리가 없다면 안에서 저 현관문을 열면 낭떠러지가 되는 것이다.
조아글리(Zoagli) 기차역으로 내려와 보니 화장실도 열려있고 바닷가 절벽 위에 작은 공터도 있다. 이 철도 건너에 있는 공터에 텐트를 치고(좌표 44.335372,9.268792) 바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절벽 아래엔 멋진 해안이 펼쳐져 있다. 포근한 날씨에 햇빛도 따사롭고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기찻길 건너 공터에 텐트를 쳤다.
텐트 앞의 눈부신 풍경
기차역 화장실. 앞으론 기차역 화장실을 애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은 한다.
산 위를 고불고불 도는 도로를 따라 공공 공원도 주차장도 전혀 없다.
해안을 따라 이런 산의 연속이다.
멋진 풍경과 따뜻한 햇살에 방끗 웃는다.
저 아래 키아바리가 보인다. 이제 내리막길이라는 뜻이다.
왜 뿌연 물 색깔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낮이 되었으니 또 달렸다. 태산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데 달리고 또 달리면 태산까지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저녁이 되어 키아바리(Chiavari)에 도착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평소와 달리 텐 칠 곳을 찾기 전에 바닷가 공원에서 먼저 밥을 해 먹었다.
오늘은 덴마크에서 연마한 일명 “짝퉁 리조또”의 캠핑버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학생식당을 비롯해 값싼 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보통 외식하고 기숙사에는 당연히 부엌이 없지만 덴마크나 유럽은 정반대이다. 학생 기숙사엔 당연히 부엌이 있고 학생들은 당연히 보통 스스로 요리를 해먹는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있던 덴마크 공대(DTU)의 유일한 학생 식당마저 가격도 비싸고 주말에는 문을 닫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거의 6년간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항상 학생 식당에서 밥을 사먹던 나로서 덴마크 공대의 유일한 학생 식당의 비싼 가격 때문에 사먹지도 못하겠거니와 주말에 열지조차 않는 것의 새로운 문화 차이에 충격을 받았다. 역시 견문을 넓히러 유럽에 오길 잘 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 속에서 다른 한국 교환학생들이 그렇듯 처음으로 스스로 요리해먹기 시작했다. 다양한 요리를 시도 했고 이제 나만의 전문 요리로 자리 잡은 것은 된장찌개, 각종 볶음밥류, 그 중 특히 삼겹살 볶음밥(덴마크 삼겹살이 맛있다) 그리고 바로 “짝퉁 리조또”다.
보통의 “짝퉁 리조또”에는 야채와 베이컨, 버터가 들어가지만 캠핑장비로 야채와 베이컨을 따로 볶이가 쉽지 않고 버터를 보관하기가 용이하지가 않기 때문에 캠핑 버전에는 야채대신 야채가 재료로 포함된 파스타 토마토 소스와 올리브오일에 보관된 참치 그리고 살라미 소시지를 넣는다. 보통 모짜렐라, 파르미쟈노 등 상황에 따라 치즈를 넣는데 치즈도 생략했다.
키아바리에 도착하여 여러 식품을 구입하였다
이것이 “짝퉁 리조또”의 캠핑버전이다. 이 캠핑버전은 앞으로 더 발전하게 된다.
물론 너무나도 맛있게 먹은 후, 이제 밤이 되었으니 잠자리를 찾아 나선다. 키아바리 외곽으로 나가다 보니 길거리에 매춘부가 군데군데 조금씩 보인다.
세 매춘부가 함께 서있는 곳 뒤 건물 앞 작은 부지에 텐트 칠만한 곳이 있을까 확인하러 들어갔다. 건물 앞 작은 부지는 건물과 평행한 한쪽은 촘촘한 나무들로 막혀 골목 같은 형태를 이루었고 옆은 트럭 두 대가 주차되어 있고 남은 한 쪽은 담으로 막혀 있었다.
즉 두 트럭을 비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 내부 작은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이 공간의 입구가 되는 트럭을 등지고 이렇게 텐트치기 적당한지 살피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내 등 뒤에 다가와 날 응시하던 그 그림자 지워진 눈빛을 보고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 명의 매춘부가 보인다. 텐트 칠 곳을 찾으러 저 뒤 나무와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