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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신에세이
2008.04.24 01:22

버스안에서 생긴 일 (4월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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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중 약속잡힌 일을 하러 글라스고의 북쪽지역인 스프링번(Springburn)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시내중심가를 벗어나 어디선가 어떤 중년남자가 버스에 오르고나서부터 그전까지 아주 평온하던 버스안의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방어태세를 취하면서 표나지않게 그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술냄새가 없는 걸 보니 아침부터 곤드레만드레 취한 술주정뱅이는 아닌 듯한데, 끄덕하면 팔까지 홰홰 저어가면서 횡설수설 씨부렁대는-좀 교양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싶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다-꼴을  보니 어쩌면 정신이 온전치못한 걸까?  그렇게 보기에는 또 허우대가 멀쩡해보이잖아...  저러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저렇게 떠들려면 자기집에서나 실컷 떠들 일이지, 쯧쯧.
나 혼자서 속으로 이런저런 유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어떤 버스정류장에서 아주 몸집이 작고 앳되보이는, 내눈에는 꼭 중국인으로 보이는 한 나이어린 아가씨가 버스에 올라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가씨가 버스 통로로 지나가는데 그 중년남자가 괜히 아는 체를 하며 그 아가씨에게 말을 붙인다.  아이구, 꼴에 사내라고, 예쁜 아가씨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군.  그 아가씨는 내 뒷쪽에 텅 비어있는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버스가 움직이자 제자리에 앉아있던 그 남자가 뒷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살짝 돌아보니 내눈에는 그 남자의 넓다란 등짝만 보인다.  그 아가씨와 자리를 마주 보고 앉은 까닭이었다.
나는 듣지않으려고 해도 좌석이 워낙 가까웠던 탓에 그 사내가 그 아가씨에게 뭐라고뭐라고 말을 붙이는 소리가 다 내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가만히 가는 아가씨에게 괜한 수작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어쩌나?  주님, 저 아가씨 아무 탈없이 지켜주시고 이런 경우에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급한 기도가 터져나온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싸가지없는 녀석의 이마빡을 야구방망이같은 걸로 따악 한대 갈겼으면 속이 후련해지련만.  처음에 멋모르고 묻는 말에 대답을 조금씩 하던 아가씨의 목소리가 언제부터인지 들려오지 않는다.  누군가 저 싸가지로 인해 점점 더 곤경에 처하고 있는 저 아가씨를 좀 도와줄 수 없을까 하는 눈으로 버스안을 휘익 살펴보니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  좀전에 버스의 앞쪽에 앉으신 어떤 아저씨가 한번 그 사내를 향해 흘깃 눈길을 주고 만 것이 다다.  눈에 보이지않아도 내 뒤쪽에 있는 그 어린 아가씨가 점점 코너에 몰리고 있음이 뻔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순간 무서움에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던 그 아가씨와 눈이 딱 마주쳤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 Come here(이리 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 아가씨가 바로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내 옆으로 와서 앉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아무 대답도 하지말고 조용히 있는 거야.”  
안심이 되는지 그 아가씨가 조용히 눈짓으로 대답을 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낯선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학교에 간단다.  지금이 봄방학이라 중등학교 학생은 아닌 듯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영어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듯했다.  어느 틈에 또 옮겨왔는지 그 싸가지가 통로를 사이에 둔 우리 옆좌석에 앉아 있었다.  저런 게 사내라고 고추를 달고 다니다니, 쯧쯧, 그까짓 고추 떼서 지나가는 개한테나 던져줘라, 이놈아! (오늘은 그 싸가지로 인해서 내 교양이 잠시 출장(!)간 날이다)
내가 먼저 내릴지도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단단히 당부를 했는데 다행히 그 아가씨가 나보다 먼저 내렸다.  싸가지가 그 아가씨를 뒤따라가지않는 걸 보고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옛말에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어린 여자가 너무 불쌍해서 강한 아줌마 노릇을 한번 해보았다.  그런데 주먹 한번 썼으면 속이 시원할 뻔했는데 사회적인 체면(!)때문에  못써서 아직도 주먹이 근질근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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