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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신에세이
2009.04.08 01:38

아주 예쁜 심부름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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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거실 한 켠에 분홍빛 장미와 안개꽃 그리고 주홍빛 카네이션이 함께 어우러진 예쁜 꽃다발이 목이 긴 유리꽃병 안에 담겨있다.  
나이 팔십이 넘어서도 요즘 유행하는 추세라며 거실과 복도에 새로운 카펫을 깐 옆집의 할머니께서 내게 깜짝 선물로 안겨준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쩌면 심부름 값인지도 모르겠다.  
한사코 안 받겠다고 했건만, 이 할머니도 진짜 못말린다. 주시겠다는 동전을 안 받으니까 기어코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예쁜 꽃다발로 심부름 값을 주시니까 말이다.
“아까 왔었는데 그때는 네가 아직 집에 안 들어 왔더구나. 그래서 다시 왔어. 자 이거…”
“어머, 할머니 제가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고맙다.”
“천만예요.  언제든지 필요하시면 저를 부르세요, 바로 나갈께요.”
“알아, 내가 부르면 네가 언제나 여기 있을 거라는 것을…”
얼마전 저녁을 먹고 한가하게 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옆집 베티 할머니께서 한 손에 예쁜 꽃다발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헐렁하게 붙어있던 번지수 문패가 떨어진 후, 왕진 온 집을 못찾아 헤매다 돌아가려는 찰나에 나에게 말을 건 동네 보건소의 의사선생님에게 절묘한 타이밍으로 작은 도움이 되어 베티 할머니 댁으로 안내해드리고 그 의사선생님이 주신 처방전을 할머니께서 내게 주시면서 자기 대신 약국에 가 약 좀 받아달라고 했던 날 저녁이었다.  
늙어가니까 산부인과 빼고는 안 가본 데가 거의 없는 것같다, 면서 그래도 지팡이 짚고 씩씩하게 동네 보건소로 또는 종합병원으로 눈이며 다리 기타 등등의 검진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시던 분이 지난 초봄 눈 오고 바람 세차게 불고 하던 날들을 뒤로 해서 요즘은 바깥 나들이도 제법 줄이고 어떤 때는 의사의 왕진을 받으시기까지 하신다.
최근 들어서는 어떤 때는 체내의 혈액이 묽어졌다가 또 어떤 때는 너무 진해졌다가 오락가락해서 계속 해서 혈액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웃인 내가 할머니를 염려하는 걸 아시는지 내가 꼬치꼬치 묻지않아도 할머니께서 내게 병원 가시는 날이면 꼭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말씀해주시곤 한다.  
할머니께서 목에 특별한 깃을 하고 나를 깜짝 놀라게 하셨던 날, 갈증이 몹시 나니 괜찮으면 근처 편의점에 가서 레모네이드를 한 병 사다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으셨다.  물론이죠,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개의치마시고 저를 부르세요, 하면서 할머니 심부름을 해드린 게 내가 이리로 이사오고 난 이래로 처음이었다.  
옆집 할머니 심부름을 간다니까, 아직 ‘심부름’이란 낱말을 모르는 어린 아들은 그게 뭐냐고 묻는다.  할머니 덕분에 아들에게 심부름이란 단어도 알려주고 나는 모처럼 내 이웃에게 좋은 일도 하고,  레모네이드를 사온 뒤에 영수증과 잔돈을 전해드리니 할머니는 곧바로 거스름돈중의 얼마를 내게 심부름 값으로 주려고 하셨다.  
그렇게 하시면 저 앞으로 할머니 심부름 안 해드릴거예요.  저도 점점 나이들어 가는데 앞으로를 대비해서 좋은 일 보험을 드는 거예요. 솔직히는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내가 여기 사는 동안 할머니 초상을 치를까봐 겁이 나서도 나는 요즘 자주 할머니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기도한다.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서  늘 기도해주시는 고마운 분이시기도 하고 나이들어 힘없는 노인이지만 그래도 바로 지척에 신실한 어르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내 마음에 무척 위로가 되기도 함이 또한 사실이다.  
한번은 내가 깜박 정신을 잃고 들고 온 가방도 신발도 지팡이도 다 문밖에 놔두고 또 문까지 잠그지않은 할머니를 불러서 딸같은 잔소리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괜히 심장이 떨려왔다.  
혹시 안에서 쓰러지신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나 혼자는 겁나서 들어갈 수가 없고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이웃이 누가 있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그때서야 겨우 안에서 불이 켜졌다.  참 다행이었다.  
한참만에 문을 여신 할머니께,
“할머니, 제발 저 심장 좀 떨리게 하지 마세요.  지팡이는 밖에 놔두어도 괜찮지만, 가방과 신발은 뭐예요?  또 문도 안 잠갔잖아요.”
어딜 가든지 항상 나이든 이웃을 만나는 나는 어쩌면 이런 육신이 약해진 노인들을 따뜻하게 돌봐드리라는 주님의 특별한 심부름을 받은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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