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자전거나라와 함께 하는 이탈리아 에세이 2화
여행자의 가슴에 불을 댕기다, 바티칸
한 남자가 밀림에서 발견됩니다. 현대판 “늑대소년”처럼 숲에서 자란 그는 30살이 넘어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숲에서의 시간만큼 사람들과 생활했지만 60세가 넘어 마지막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단 몇 단어뿐이었답니다. 이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사람에게는 매 단계마다 발달의 시기가 있고 그는 언어발달의 시기를 지나쳤기에 후에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문득,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감성이라는 것이 발달하는 시기도 있을까?
그런 시기가 있다면 소위 말하길 “감수성이 가장 발달하는 시기”, 사춘기 일까?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람들은 그 감수성이 가장 발달하는 시기를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첫눈에 반한다고 해도 그 사랑을 지속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한데 나의 어린 시절 감성을 나의 일생 동안 지속하는데도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이드를 하며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수의 분들께서 들려주는 공통된 말씀.
“기대보다 그 작품은 멋지지 않았어요.”
“상상보다 그 유적은 웅장하지 않았어요.”
“박물관을 갔는데 뭘보아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림들이 다 똑같아요.”
“성당은 그게 그거에요.”
“무척 멋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했어요.”
“유럽여행”은 그 단어만으로 가슴을 뛰게 합니다. 부모님을 따라 여행을 나올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고 휴가로 떠나 올 수도 있고, 직장을 때려 치고 멋지게 떠나올 수도 있죠. 그 이유는 모두가 다르더라도 비행기 속에서의 설렘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 발을 내 디딜 때 꼭 보아야 할 리스트에는 바티칸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서서 그 작품들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막연함과 그 작품 앞에 감동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당혹감과 마주치고 말죠. 우스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난 7년 간 바티칸 투어를 하면서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설명도 없이 들어서자 마자 울음을 터트린 분은 전날 소매치기 당한 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 아무런 설명 없이 감동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땐 자연 앞에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유럽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은 때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이 곳에 도착만 하면 이 땅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게 만듭니다. 이건 저희가 만나는 여행객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유로자전거나라의 모든 가이드들이 가이드 이전에 여행자였기에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유로자전거나라가 만들어지기 이전, 장백관 대표가 한 명의 여행자이던 때, 유럽에 나와 유명하다는 미술관들을 다니면서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작품 앞에서 설명을 듣고 흥미로운 얼굴을 한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에는 유럽 개별여행이 보편화 되지 않은 10년 전이었으니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미술관 설명은 훨씬 부족했을 겁니다. 특히 바티칸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 천장화 설명을 한참이나 듣는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은 부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시작은 언제나 사소한 이유입니다. 그들이 흥미 있게 듣는 내용이 궁금했고, 알게 되었을 땐 궁금해 하는 다른 여행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졌고, 그 이야기에 매료된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한 여행객의 이야기가 자전거페달을 밟듯 시작이 되어 속력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국인 여행객들은 오전 박물관에 입장해서 반나절 관람을 하고 박물관을 나섭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반나절이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들에겐 익숙한 이야기, 익숙한 종교, 익숙한 인물의 나열이었지만 우리에겐 아니었거든요. 생소한 역사, 들은 적은 있으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단어들..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습니다. 그와 함께 조금 더 쉽고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방법은 없을까 고민과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전일 바티칸 투어가 만들어졌고 그 어느 나라의 여행자들보다도 더 일찍 모임장소에서 만나 가장 먼저 바티칸 박물관에 줄을 섰고 가장 늦게 박물관을 나섰습니다.
지금은 그런 우리의 모습이 외국인들에겐 신기하게 보이나 봅니다. 한번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 저희를 보고 한참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께서 진지하게 물어보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 하는 거냐? 한참을 보고 있었는데 다들 너무 재미있게 듣더라. 너무 궁금하다!!”
예술은 한 천재가 그 순간의 영감으로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작품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사람들의 감정 그 작가의 인생이 빚어내는 것이겠죠. 특히, 바티칸에 있는 대다수의 작품들의 시대에는 종교가 관통을 하고 있으니 기독교라는 종교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그림 속에 작가와 역사 그리고 종교가 담겨 있는 것이죠.
종교화의 가장 주된 목적은 종교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니 우선 종교화를 읽는 법을 알려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이순신 장군을 얼굴을 보고 알아보지 않듯 (큰 칼을 옆에 차고 계셔야죠) 그림 속 인물을 알아내는 아이콘부터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는 그림을 읽는 법까지.. 그리고 그림들이 변해가는 근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역사적 사건들과 작가들의 일생을 들려드렸습니다. 투어를 마치고 가이드에게 손님들이 말합니다. 지금 들은 것을 유럽여행의 처음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다른 도시의 다른 박물관에서도 이런 설명을 듣고 싶다고.. 그렇게 바티칸을 시작으로 런던, 파리, 마드리드의 미술관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이 설명들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도움이 되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유럽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죠. 여행이 사람을 성장 시킨다면 풍성해진 여행은 분명 더 큰 힘을 발휘하리라 믿습니다.
언제간 읽은 백지연 씨의 글입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세상은 느끼는 만큼 만져지는 것이다. 세상은 보고 듣는 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생각하는 만큼 내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티칸 박물관의 중심에 한 남자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Buonaroti,1475~1564]
바티칸 박물관에 도착하면 많은 분들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건 박물관 입구부터 늘어선 엄청난 줄이죠.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길게 늘어선 이들에게 만약 왜 이리 줄을 서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투어를 하면서 그 장소에 익숙한 작품이 있다는 것은 흥미를 유발하는데 있어 가장 큰 요소가 됩니다. 더욱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라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없죠. 길이 40미터, 폭 13.2미터의 이 엄청난 그림은 거대한 그림이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33세에서 37세까지 어쩌면 자신의 능력을 가장 매력적으로 펼칠 수 있는 나이일 그 시기에 그는 이 그림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죽을 때까지 조각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의 설전 일화에서도 나오듯 조각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4년 반이란 시간을 천장을 바라보 고 어깨가 돌아가고 척추가 휘고 디스크의 고통까지 감수하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를 시기하던 주변의 계략과 자금과 교회 권력의 압박까지 ..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작업을 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들 비위를 맞출 성격도, 처세에 능한 사회성도 없었죠. 그러나 자신의 성격대로 고집을 부리기엔 그가 부양해야 할 가족들을 무시할 성격도 못되었습니다. 남들이 응원해주고 칭찬해주어도 하기 힘든 작업을 돈 때문에 자존심을 꺾었다는 비난과 실패하기만 기다리는 시선 속에서 그는 묵묵히 완성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대부>를 만든 프랜시스 코플라 감독은 예술가를 자처했던 자신이 대부를 연출하기로 동의한 사실 자체가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타협이었다고 생각했답니다. 영화 작업을 끝내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으로 악화된 상처를 보듬으며 파리에서 각본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친구가 전화를 걸어 “대부가 어마어마하게 성공했다.”고 말하자 그는 “그래? 별일이구만” 하고서 각본에만 몰두했다고 하는데, 미켈란젤로도 천장화 작업을 마치고 엄청난 찬사를 뒤로하고 “별일이네”하고서 조각에 몰두하였을 상상을 하면 어쩐지 웃음이 납니다.
대부 에피소드에 영화평론가 이동진씨가 이런 글을 남겼죠.
“그러니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조건이 아닐 겁니다. 쪼들리는 시간과 압박해오는 공간 사이의 어느 작은 지점에 위태롭게 버티고 선 채 절박한 몸부림으로 빚어낸 무엇인가가 최상의 결과를 빚어냈던 사례들을 정말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요.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이라고 할지라도 걸작은 의도와 야심으로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만드는 이의 능력과 향유하는 이들의 반응과 작품이 놓이는 특수한 상황이 시 공간의 은총을 입어 절묘하고도 신비롭게 결합되었을 때에야 가능해집니다. 창작 역시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일종의 우연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앞에서, 예술은 비로서 이 비루한 삶에 진정한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예술이 주는 감동은 걸작의 위대함보다도 나의 삶 속에 여운을 던질 때 더욱 극대화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감정은 작품의 내용만을 접한다면 느끼기엔 힘들 것입니다. 그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고통을 견디어 완성한 그림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서 느껴지는 것이겠죠. 4년 6개월이라는 시간입니다. 투어를 하며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분들이 홀로 여행을 떠난 여성분들입니다. 대다수의 사연이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온 분들이 많죠.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간은 4년에서 5년 사이가 많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위기가 오는 시기가 4년 차인가 봅니다. 오죽하면 결혼생활도 3년 후부터 위기라고 할까요? 저 역시도 가이드를 하며 가장 지겹다고 느꼈던 시기가 4년 차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저의 마음을 다잡게 해준 건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였습니다. 가이드를 하며 가장 크게 배운 건 예술이 고리타분한 책 속에 담긴 멀고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에 힘이 되기도 위안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안은 어머니 마리아. 피에타는 “비탄”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를 잃은 이들의 슬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다양하게 읽혀질 수 있겠죠. 처음 가이드가 되어 피에타를 보았을 때 죽은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얼굴이 너무나 무뚝뚝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는 생각을 했지만 벅찰 정도의 감동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투어를 하고 반년 정도 지난 어느 날 투어를 마치고 홀로 베드로 성당에 들어섰다가 피에타 앞에서 저도 모르게 울고 말았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이탈리아로 떠나온 저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슬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무표정하게 앉아계신 마리아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저에게 “너도 눈물이 안 날 만큼 믿기지 않느냐.. 나도 그렇다” 라고 말해주는 듯해 처음으로 저의 마음을 누가 이해해 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날부터 투어를 마칠 때면 어머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죠.. 말을 함으로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손님들이 저에게 위로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위로를 받았듯 또 다른 누군가도 맘껏 울어도 된다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제가 30세를 넘기고 피에타를 마주했을 땐 예수보다 어려 보이는 마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5살에 어머니를 잃었다고 합니다. 피에타를 만들고 어려 보이는 마리아의 얼굴에 대해 성스러운 여인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지만..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5살의 시선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들도 있었답니다, 제가 30살이 넘어가며 제 또래의 어머니들은 환갑에 가까운 연세가 되시죠. 종종 어머니와 딸이 여행을 오면 처음 가이드를 하던 해에는 그렇게 부럽더니...... 어느 순간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제야 저도 깨달았습니다. 제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50대 셨으니까요......
이 글을 쓰기 위해 며칠 전 다시 피에타를 보러 갔습니다. 예수를 안은 마리아는 아들보다 훨씬 덩치가 큽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은 완벽한 균형감을 가지게 되죠. 그런데 이번에 제 눈엔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모습이 아이를 안은 모습처럼 보였답니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예수님을 안기 위해 한쪽 발은 돌 위에 올라있죠. 그래야만 제대로 아들의 목을 받쳐줄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돌이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저는 아이가 품 안에서 잠이 들면 목이 뒤로 졎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한쪽 다리를 더 높이 세워야만 합니다. 돌아가신 예수는 우리의 시선으로는 괴로워 보이지만...... 어머니 마리아의 시선에서 내려다 본다면 아주 평온한 미소가 보입니다.
아들이 안겼을 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아는 건 어머니뿐이겠죠. 출산 후 투어를 쉬면서 거반 2년 만에 다시 마주한 피에타였습니다. 저 역시도 저리도 편안하게 다시 한번 어머니의 품에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제가 저렇게 안아줄 수 있는 아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 드렸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다가설 수 없는 천재가 아니라 로제마리 슈더의 책 제목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미켈란젤로”로 우리에게 다가섭니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에 돌아가 적응을 마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여행의 모든 기억은 행복하고 그리운 추억으로 다시금 떠오르게 되죠. 그리고 그 감정을 함께 호흡하고 느꼈던 동료로 가이드를 떠올리게 되면 저희 유로자전거나라 홈페이지에 그 때의 추억을 글로 남겨주시곤 합니다. 투어 때 들었던 지식들은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품을 보았을 때 감정들과 그 때 받았던 감동들에 대해 적어 주십니다. 최근 한국에도 미술 서적들이 많이 출간되면서 관련 시적들을 사서 읽어보았다는 말씀들도 많이 해주시죠.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의 힘듦에 작품들로 위로 받은 이야기, 여행 후 일상에서 힘겨움에 여행의 기억으로 힘을 얻는 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합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아직까지는 그림이나 조각이 어렵게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많죠. 그래서 종종 박물관을 들어서기 전, 난 예술에는 관심이 없다 또는 난 그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선입견에 작품들을 만날 기회 앞에 먼저 벽을 만들어 두진 않았나요? 하지만 우리는 유럽의 환경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풍경들에 노출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감성을 놓쳐버리기가 쉽습니다. 작품을 바라 본다는 것은 작가의 생각과 그 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그림책을 읽어나가는 작업 같습니다. 우리의 투어가 작게는 그림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 놓쳐버린 감성에 다시금 불을 지피고 예술이 나의 일상으로 들어왔을 때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요.
왠지 미켈란젤로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사람들이 멋진 미사여구로 추켜세워주는 칭찬보다 여행객이 들려주는 “당신으로 인해 제가 힘을 얻었습니다.” 라는 말을 더 좋아해 줄 것 만 같습니다.
예이츠가 한 멋진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육이란 지식의 보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것이다.”
거창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번 바꿔보고 싶습니다.
“투어란 지식의 보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것이다.” 라고…
<사진 kimminjoo ↓>
글,사진: 유로자전거나라 김민주
제공: 유로자전거나라 (www.eurobik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