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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1.09 03:3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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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 바람의 기억 1. 놀라지 마라, 삶의 함정은 어디에도 있다 희끗희끗 눈발이 흩날렸다. 성긴 눈송이는 날개를 찢긴 배추흰나비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나풀거렸다. 나비는 횡에서 사선으로, 다시 사선에서 횡으로 오직 거친 바람결에 휘둘려 정처 없이 쓸렸다. 정아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목도리를 풀었다. 점원아가씨가 다가와 에이프런주머니에서 꺼낸 주문서 위에 쥐고 있던 볼펜을 세웠다. 정아는 일행이 있다고 말했다. 아가씨는 명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밀가루에 이스트를 과다하게 넣어서 빚은 것 같은 희고 도톰한 손을 다시 에이프런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정아는 숄더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찻집의 위치가 교통이 불편한 해안가여서 버스 운행시간에 맞추다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밖과는 달리 실내는 조용했고 차분했다. 전기를 먹은 다다미바닥의 감촉은 엉덩이가 방석 위에서 느긋하게 오수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따뜻했고, 고목의 생애가 고스란히 드러난 앉은뱅이 테이블은 이웃과의 거리를 넉넉하게 두어 시야가 시원했다. 자투리 공간 곳곳에 비치한 반닫이와 뒤주 같은 고가구들 덕분에 고풍스러운 한옥에 들어와 있는 느낌도 들었다. 음악 또한 잔잔한 연주곡 위주로 흐르고 있어서 한적한 찻집을 고집하는 차 마니아라면 불편한 접근성을 감수하고도 부러 찾아올 만한 공간이었다. 궂은 날씨 탓인지 실내는 한적했다. 정아를 제하면 손님이라고는 반대편 창가 테이블에서 주먹으로 턱받침을 하고 가끔 이편을 힐끔거리는 중년의 남자가 유일했다. 진입로로 택시가 들어섰다. 정아는 택시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다 말고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휴대폰이 뒤집힌 풍뎅이처럼 진저리를 쳤다. 정아는 망설이다 창을 열었다. -씨발, 딸내미 냉방에 버리고 잠수라도 탄 건가 정아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얼른 창을 닫았다. 진동이 계속되자 휴대폰을 백 속에 넣고 목도리로 덮어 눌렀다. 가슴에 바늘쌈지라도 들어온 것처럼 통증이 왔다. 내용으로 보아 놈이 다시 집에 온 게 확실했다. 지난 주말 아침 놈은 딱지를 붙이러 온 집달리처럼 막무가내로 문을 밀고 들어와 방바닥 여기저기에 선명한 신발 자국을 남겼었다. 정아는 놈의 서늘한 눈매와 차가운 말투며, 매달려 애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정하게 둘러메쳤을 완고한 어깨를 떠올렸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냉정한 눈빛과 말투와 완력으로 은지를 다그쳤을 것을 생각하니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날 아침 놈의 출현에 놀라 잠에서 깬 은지가 정아의 품에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엄마, 저 아저씨는 누구에요? 놈이 고개를 스윽 돌려 은지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아저씨 이름? 미친개! 잠수를 탔느냐고 묻는 미친개의 문자는 정아의 지금 심정을 꿰뚫는 구석이 있었다. 정아는 요즘 자신이 고통의 바다에서 홀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하여, 이 고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취 없이 사라지는 길뿐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던 것이다. 햇살 좋은 가을 날 쥐고 있던 손을 펴 소리 없이 가지를 떠나가는 낙엽처럼 그렇게 품위 있게 사라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할 수도 있겠다는 다짐을 무시로 했던 것이다. 주차장 들머리를 넘어선 택시가 속도를 줄이며 경적을 울렸다. 에이프런을 고쳐 매고 있던 아가씨가 허리를 굽혀 밖을 내다보다가 뭔가에 놀라는 모양으로 급하게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동백나무를 품은 화분 두 개가 바람의 세기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택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가씨는 범퍼 앞에 드러누운 화분의 목을 드잡이하듯 차례로 낚아 건물 외벽에 나란히 붙여 세웠다. 택시 문이 열렸고 영미가 내렸다. 정아는 영미야 여기야, 하는 모양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나 영미는 바람에 휘둘리는 치마를 단속하느라 이편을 보지 못했다. 영미 뒤를 이어 한 명의 여자가 더 내렸고 택시는 빈 주차장에 원을 그리며 사라졌다. 출입문 양편에 선 파키라와 홍콩야자의 이파리가 크게 흔들렸다. 정아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이구, 이놈의 바람이 미친년 고쟁이를 삶아 먹었나봐!" 안으로 들어서며 큰소리로 투덜거리는 영미의 등을 뒤따르던 여자가 손바닥으로 후려치고는 깔깔거렸다. 건너편 남자의 시선이 두 여자에게 쏠렸다. 영미는 손님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는 듯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남자를 향해 목례를 했다. 영미와 여자는 출입구에서 와이자로 갈렸다. 여자는 건너편 창가 테이블로 가 거기 남자와 합석을 했고 영미는 그 남자를 향해 다시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정아에게로 왔다. "바람 장난 아니지? 한겨울에 웬 왜바람인지 모르겠다." 부츠를 벗으려고 미니마루에 걸터앉은 영미의 등에 대고 정아가 말했다. 영미가 동작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왜바람? 이렇게 싸가지 없는 바람을 왜바람이라고 하는 거야? 왜놈이라고 할 때 왜 자?" 정아는 입술에 오른손 검지를 세워서 붙였다. 영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어쩐지, 엉큼하더라! 이것들이 틈만 나면 치마를 들치고 지랄이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저만치서 점원아가씨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정아는 눈짓으로 건너편 창가 테이블을 가리키며 다시 입술에 검지를 댔다. "괜찮아, 고바야시 쟤는 한국말 못 알아들어." "아는 사람이야?" "그럼, 전에 내 손님이었어." 정아는 아까 건너편 남자가 통화하는 소리를 언뜻 들어서 그가 일본인일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도 내 손님이지." "그래? 근데 저 남자 아까 전화로 거짓말 하더라. 자기 지금 도쿄 거래처에 도착해서 미팅 중이라고. 여기가 언제부터 일본 땅이야?" "하하하... 저 친구 우리 일본어 도사에게 딱 걸렸구나. 하긴 쟤 나하고 호텔에 있을 때도 전화 오면 지금 공원에서 조깅하느라 숨이 차다고 둘러대고는 했어. 그런 거짓말은 잘해도 매너는 좋은 사람이야." 영미는 부츠를 벗느라 안간힘을 썼다. 두 손으로 부츠의 목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던 영미가 어느 순간 어머, 하고 소리치며 부츠 한 짝을 허공에 날렸다. 놀란 정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미를 감싸 안았다. 영미는 허리를 접은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잠시 후 영미는 허리를 접은 채 은밀한 접선의 포즈로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저쪽에서 봤느냐고. 정아는 못 본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다. 영미는 날아간 부츠를 가져와 짝을 맞추고는 정아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아유, 창피해! 세상에서 부츠코로 지 마빡 깐 년은 나밖에 없을 거야." 정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입술에 물고서 영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영미는 점원이 가져온 물수건을 이미 볼록 솟아 오른 이마에 대고 톡톡 두드리면서 그동안 잘 살았는지 물었고 정아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오전에 전화로 약속 시간을 잡으며 했던 안부의 말들을 둘은 다시 되새김하듯 주고받았다. 눈발은 뜸해졌지만 바람은 더 거세졌다. 높은 파도를 계단 삼아 바다를 내달려온 바람은 해안가에 선 나무들의 몸통을 비틀거나 머리채를 휘감아 잡도리를 하고는 우우 소리를 지르며 몰려다녔다. 지대가 높은 찻집 주위는 바람의 집결지 같았다. 떼로 몰려와 통유리를 툭툭 때리며 안을 들여다보거나 출입문을 잡아 흔들기도 하고 그러다 심통이 나면 돌연 모래와 흙먼지를 끌어다 유리창에 뿌렸다. 예로부터 여자와 돌과 바람이 많기로 소문난 이 섬에서도 지금의 바람은 거칠고 난폭한 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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