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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1.17 04:27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3)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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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3) 바람의 기억 1. 놀라지 마라, 삶의 함정은 어디에도 있다 정아는 문득 바람의 횡포가 자신을 대하는 미친개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놈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구석에 멍울로 박혀있던 모멸감이 다시 스멀스멀 부피를 키웠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차가운 손의 감촉이 뜨거워진 이마를 위로하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에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영미가 정아의 손을 밀어내고 이마를 만지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정아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근데 우리 은지는 왜 안 데려왔니? 올 줄 알고 좋아하는 초코렛 사왔는데.” 영미는 백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정아에게 건넸다. 얼핏 초콜릿과 막대사탕이 보였다. 정아는 그러잖아도 데려오려고 했는데 날씨도 궂고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말끝을 흐렸다. 감기약은 먹였느냐고 영미가 다시 물었고 정아는 이따 약국에 들러서 가겠다고 대답했다. “지랄한다, 약부터 먹였어야지. 그러잖아도 아픈 애를.” 영미의 타박과 닦달이 이어졌다. 정아의 가슴 구석에서 바늘쌈지 같은 것이 다시 또 꿈틀거렸다. 은지에게 엄마 얼른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을 때 은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안고 있던 코알라 인형을 흔들며 저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썼다. 아침에 영미와 통화한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은지는 이태 전 생일에 영미로부터 코알라 인형을 받았고, 이후 영미를 코알라이모 라고 불렀다. 은지는 평소에도 심심해지면 코알라이모는 언제 오느냐고 묻곤 했는데 그건 영미가 가끔 맛있는 군것질거리를 한아름씩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정아는 미친개를 떠올리며 은지를 집에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참, 아까 병명이 뭐랬지? 우리 은지.” 영미가 손짓으로 점원아가씨를 부르며 물었다. “발작성 상실성 빈맥.” “발작성 상실? 젠장, 이름부터가 고약하구나. 그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면 곧 터져서 죽을 것 같이 아픈 병이라며?” 정아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요즘 들어 뜸해졌지만 언제 다시 증상이 나타날지 몰라 항상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게 왜 하필 착하고 예쁜 우리 은지에게 붙었다니? 참 속상하다.” 점원아가씨가 허리를 굽혀 테이블 위에 세워진 메뉴판을 볼펜을 든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보이차로 할게. 너는? 영미가 메뉴판을 정아 앞으로 밀었다. 정아는 건성으로 메뉴판을 훑고는 같은 걸로 하겠다고 말했다. 메모를 하고 돌아서는 점원아가씨에게 영미는 이마에 대고 있던 물수건을 건네며 고맙다고 말했다. “수술 날짜는 잡았어?” “아직. 여기서는 안 되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가야 해.” “근데 그게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된다는 게 무슨 말이냐?” “새로운 기술이라서 그렇대. 이건 혈관을 통한 수술이어서 흉터가 남지 않는대. 보통은 메스로 가슴을 열고 하는 수술이지, 물론 이건 보험 적용이 돼. 근데 어린 것 가슴에 흉터를 만들고 싶지가 않아서... 그게 아가씨가 되어서도 꼭 죽은 지네나 지퍼처럼 남을 테니까.” “하긴. 사내 같으면 흉터가 무슨 훈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자는 다르지. 그래 신기술은 얼마 달래?” 정아는 오른손 손가락을 다 폈다가 엄지를 접었다. “사백?” 영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아는 거기에 플러스 되는 비용이 있다고 말했다. “정말 고민되겠다.” “그래서 요즘 잠이 안 와.” 영미가 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정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계산대 쪽을 바라보았다. 영미는 라이터에 불을 올리며 이쪽은 흡연구역이라 괜찮다고 말했다. 점원아가씨가 잰 걸음으로 다가와 재떨이를 건네주었다. 정아는 불이 라이터에서 담배로 옮겨가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영미가 저 담배를 다 태우기 전에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영미였다. “미안해서 어쩌니. 내가 여유가 있으면 열 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요즘 내 꼬라지가 꼭 거지발싸개 같아서 말이지.” 정아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뭔가 희미하나마 자신을 지탱해주던 중요한 버팀목 하나가 스르르 주저앉는 느낌이 들었다. 담배 연기가 테이블 위에서 안개처럼 부유했다. 정아는 연기를 그대로 견디며 괜찮다고 말했다. 영미가 정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정아는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영미에게 약간의 기대를 하고 왔던 터라 실망감이 밀려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이 말을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꺼내야 친구가 당황하거나 덜 불편해할까 고심했는데 이제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서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다. 문득 지난번에 미친개가 문을 나서며 했던 말이 아프게 뇌리를 스쳤다. 씨발, 주위에 돈 빌려줄 친척도 친구도 하나 없나? “학원에다 좀 부탁해 보지.” 영미가 건너편 창가 테이블을 힐끗 보며 말했다. “학원? 내가 말 안 했나? 지난 가을에 그만 뒀잖아. 나 지금 실업자.” “진짜? 난 몰랐지. 왜 그만 뒀어?” 그냥 그리되었다고 정아는 얼버무렸다. “원장놈이 또 집적거렸어?” 정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폐강 되었다고 보면 돼. 이제 일본어 수요가 예전 같지 않잖아.” “넌 어째 남의 일처럼 말하니? 그나저나 어쩌면 좋아.” 정아는 그동안 여기저기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으며, 지금도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것도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집세 때문에 사채를 썼다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에고, 나 같이 끈 떨어진 연처럼 곤두박질만 치고 살아온 인간이야 어떻게 살아도 괜찮지만 너는 다르잖니. 누구보다 잘 살아야 하는데 말이지...” 영미가 쯧쯧 혀를 찼다. 다구를 내온 점원아가씨가 세팅을 시작하자 영미는 건너편 창가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정아도 그편을 바라보았다. 합석한 두 사람은 찻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주로 여자가 말을 하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였다. “저년 또 시작한 모양이네. 그만 나불대고 얼른 데리고 나가지.” 영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점원아가씨가 돌아가자 정아는 넌지시 우림각 동료냐고 물었다. 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랑 같은 띠며 이름은 미경. 하지만 우림각에서는 이름 대신 ‘기싸마’로 불린다고 했다. 기싸마라면 배용준의 일본 애칭 욘사마 비슷한 별칭이냐고 정아가 묻자 영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욘사마는 용준의 준말 욘에다 극존칭 사마를 더한 거잖아. 그래봐야 용준 님 정도지. 근데 기싸마는 그렇게 단순한 호칭이 아니야.” 영미는 포트의 뜨거운 물로 잔을 데워냈다. 정아는 다시 건너편 창가를 바라보았다. 남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정아는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기싸마는 설명이 필요한 훈장 같은 별칭이지.” 영미는 우려진 보이차를 두 개의 잔에 따라서 하나를 정아에게 건넸다. 따뜻한 잔의 온기가 손끝에서 팔로 이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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