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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2.05 23:2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6)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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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6)

바람의 기억




1. 놀라지 마라, 삶의 함정은 어디에도 있다  


“글쎄, 고바야시가 너를 사고 싶단다.” 

정아가 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대두! 네 자태가 자기 이상형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아까 기싸마도 그냥 보낸 거래. 웃기지 않니?” 

정아는 건너편 창가를 바라보았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고바야시가 이편을 향해 건배를 청하듯 잔을 들어올렸다. 정아는 얼른 시선을 되돌렸다.   

“그래서 내가 저 아가씨는 다찌가 아니라 내 일본어 선생님이라고 점잖게 말해줬다. 그랬더니 더 바짝 관심을 가지더라. 아무튼 마담언니께 전화를 했으니 곧 대타를 보내줄 거야. 대타 오면 우리는 즉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은지 감기도 맛난 거 먹여야 낫는다.”

영미가 까부는 모양새로 파이팅을 외쳤다. 정아는 그거 멋진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은지가 좋아하는 치킨집이나 피자가게로 가는 게 어떠냐고 영미가 제시하자 정아는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좋아서 껑충거리는 은지 모습이 그려졌다. 근래 변변한 외식 한 번 못해서 미안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그나저나 미친개의 출현으로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혹시 미친개가 지금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아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영미가 어깨를 툭 치며 턱짓으로 창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 친구 진짜 너한테 마음이 있나봐. 지금 오케이냐고 묻는 거잖아.” 

고바야시가 이편을 향해서 엄지와 검지 끝을 잇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영미는 올린 팔을 교차시켜 엑스 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고바야시는 바로 손 모양을 바꾸어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폈다. 

“뭐야, 화대를 두 배로? 오늘 몸이 아주 후끈 달아오른 모양이구먼.” 

영미가 다시 엑스 자를 만들어 올렸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아둔 영미의 휴대폰이 진저리를 쳤다. 창을 확인한 영미가 마담언니다, 하고는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영미는 생리가 예정일보다 이틀이나 먼저 와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래서 기싸마가 도와주기로 했는데 정작 손님이 거부를 했다며 마담언니의 도움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엉너리를 쳤다. 통화가 길어졌다. 밝았던 영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닫은 영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지금 말이야 보말이야.”

정아는 영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조심스럽게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었다. 

“글쎄 날 더러 지물포에 들러서 비닐을 사가래. 자긴 현역 때 여러 번 그렇게 했다는 거야. 참 나.”

“그러니까 대타를 안 보내 준다는 거야?”

“보내주고 싶어도 없대. 단체 손님이 예약도 않고 들어온 바람에. 아까 택시 타고 집으로 가던 기싸마도 그리로 합류했대.”

영미는 포트를 기울여 찻잔에 물을 따랐다. 잔 바닥에 기진하게 누워있던 차 잎이 다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활발하게 유영했다. 

“그럼 어쩐다니?”

“하는 수 없지. 내가 출전해야지.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영미는 손짓으로 점원아가씨를 불러 지폐를 건넸다. 잠시 후 점원이 가져온 거스름돈에다 지폐 두 장을 더해서 정아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로 은지 피자 사다 줘라. 약 사는 거 잊지 말고!”

정아는 지폐를 영미 손에 되돌리며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영미가 눈을 흘겼다. 이건 네게 주는 게 아니라 은지에게 주는 것이라며 정아 백 속에다 손을 찔러 넣었다. 영미는 한 팔로 턱을 괴고 우두커니 앉아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는 제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섰다. 

정아는 고바야시 테이블로 향하는 영미의 걸음걸이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영미가 미처 마시지 못한 찻잔을 가져와 두어 모금 목으로 넘겼다. 차 맛이 맹물처럼 밍밍했다. 일순 오목가슴이 까닭 없이 아려왔다. 더없이 명랑하고 희망과 축복으로 빛나야 할 젊은 날의 일상이, 친구는 친구대로 나는 나대로 왜 이리 초라하고 비참하게만 엮여 흘러가는 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콧등이 먹먹해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정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타고 가야 할 버스가 바람과 진눈깨비를 헤치며 막 진입로를 지나치고 있었다. 

정아는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쳐낸 다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는 출입문을 그대로 지나쳐서 건너편 창가 테이블로 갔다. 굳은 표정으로 대화중이던 영미와 고바야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정아를 쳐다보았다. 정아는 고바야시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했다. 영미가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정아는 침착한 어조로 영미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갈게!”

영미가 정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아는 다시 한 번 내가 갈게, 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영미는 한동안 말없이 정아를 응시하다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영미는 호텔 로비의 원형 기둥에 등을 기대고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바야시는 정아가 마음에 꼭 드는 모양이었다. 혹시 정아의 마음이 바뀔 것을 염려한 듯 두터운 팔로 정아의 좁은 어깨를 억세게 감쌌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정아의 숄더백을 억지로 가져가 제 어깨에 걸었다. 

승강기가 열렸다. 고바야시의 어깨에 걸린 숄더백이 승강기 안에서 뱅그르르 돌자 두 사람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영미는 가슴 높이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고바야시가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정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쥔 주먹을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아까 택시 안에서 건네준 콘돔을 정아는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승강기 문이 카메라의 파인더처럼 완고하게 닫혔다. 영미는 그대로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문이 열리고 정아가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영미는 승강기 앞을 서성거리며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안을 기웃거렸다. 잠시 화장실로 가 패드를 갈고 온 시간을 빼고는 30분 넘게 근처를 서성거렸다. 틈틈이 휴대폰을 꺼내서 혹시 정아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6시가 넘어서야 영미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바람의 드잡이는 여전했고 가끔 성긴 눈발이 부나비처럼 가로등 주위를 배회했다. 낯이 익은 도어맨이 저쪽 데스크에서 손을 호호 불며 다가와 택시를 잡아드리느냐고 물었다. 영미는 손을 내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영미는 호텔을 끼고 돌아 사거리 쪽으로 나아갔다. 가끔씩 눈송이가 사선으로 날아와 얼굴을 때렸다. 저만치 약국이 보였다. 앞니 사이가 많이 비어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느낌이 확연하게 다른 보조약사가 영미를 미리 보고는 평소처럼 ‘컨디션’ 두 병과 알약을 봉지에 챙겼다. 영미는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어린이 감기약이 필요해서 왔다고 말했다. 보조약사는 봉지에 챙겼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아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영미는 잠시 주춤거리다 아마 다섯 살 쯤 되었을 거라고 대답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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