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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3.27 00:2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2)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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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12회) 바람의 기억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뼈 있는 말로 투덜거렸지만 사실 영미는 경철의 이런 모습이 좋았다. 겉으로는 무심해도 행동의 결과는 늘 다감하고 의리가 있었다. “오빠, 근데 궁금한 거 있는데, 나 쉬하다 쓰러졌을 때 말이야, 방에서 왜 날 덮치지 않았어? 그날 덮쳤더라면 이 미역국 주인은 내가 될 수도 있었잖아.” “이년이 진짜 취했네, 취했어.” “말 돌리지 말고, 오늘 진실을 말해봐. 팬티 갈아입혀주기 전에 입맛 다시면서 잠깐 갈등 튀기는 거 내가 실눈으로 똑똑히 봤어.” 영미는 경철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바짝 다그쳤다. “오빠, 속으로는 하고 싶었지?” “돌았나 이게! 그건 인마 팬티 앞과 뒤가 어딘지 헷갈려서 그런 거지. 근데 그때 정신이 돌아왔었어? 분명히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는데.” 영미는 더 놀려주고 싶어서 정색하며 말했다. “시체는 무슨 시체야,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지. 이놈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나보자 하고.” “그럼 내가 욕실로 데려가서 씻겨줄 때도 정신이 있었다는 거냐?” 순간 영미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히면서 눈이 둥그레졌다. “뭐, 뭐? 욕실에서 나를 씻겼다고?” 경철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미가 허리를 접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경철이 영미의 등을 토닥거리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럼 어떡하니. 바지가 온통 오줌에다 흙 범벅인데 그걸 입힌 채로 침대에 눕힐 수는 없잖아. 그래서 홀랑 벗겼지.” 영미는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젖은 하의를 벗겨 급히 세탁해서 입힌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얘기인가 싶었다. 영미가 얼굴을 숙인 채로 소리쳤다. “그럼 다 보고 만졌겠네?” “만지지 않고 어떻게 씻니.” “나쁜 놈! 난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지금껏 은인으로 알고 있었어.” “이거야 말로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지, 구해서 깨끗이 씻겨주고도 욕을 먹네.” 허리를 편 영미는 실실 웃고 있는 경철을 노려보았다. 경철은 당시 청춘을 인수하기 전이었다. 청춘의 사장은 우림각의 전설로 불리는 장 마담이었고 그는 청춘의 주방장이자 바지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날 경철은 출근을 하다 취해 쓰러진 영미를 발견했고, 이 아가씨가 혹시 우림각 소속의 신입 다찌인가 싶어 도움을 준 것이었다. “아, 창피해. 그 놈의 폭탄주 때문에...” 영미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소주 두 병 정도는 별로 티를 내지 않고 마셨다. 막걸리나 와인, 맥주는 음료수처럼 마셔도 별탈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독 양주에 약했다. 룸싸롱에서는 소주를 팔지 않기 때문에 영미에게는 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님과 호텔로 2차를 나가기 전까지 업소의 매상을 최대한 올려줘야 하는 입장이어서 요령껏 마신다 해도 언제나 주량의 한계를 넘겼다. “근데 오빠 혹시 고자 아니야? 아니지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으니 그럴 리는 없고, 진짜 졸라 자존심 상하네. 그때 왜 나를 덮치지 않았을까? 업소용이라서?” “가시나, 내가 하이에나냐? 시체를 먹게?” “하긴... 그러네. 어쨌든 그날 오빠는 내게 천사였어. 인정! 그러니 오빠는 천당 갈 거야. 혹시 점수가 약간 모자랄 것 같으면 말해. 기도 잘하는 기싸마하고 밤일 잘하는 내가 진심을 담아서 추천서 써줄게.” 영미는 잔을 채워 경철에게 건넸다. 잔을 비운 경철이 수저로 미역국을 떠서 한입에 넣더니 갑자기 몸을 틀고 자리를 박찼다. “이런 바보! 자기가 끓여놓고도 몰라? 미역국은 뜨거워도 김이 안 나잖아. 자, 얼른 소주로 식혀.” 경철이 손부채로 연신 바람을 만들어 혀를 말렸다. 영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가만히 경철을 바라보았다. 영미는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두 명의 남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명은 우주의 한 구석에 허겁지겁 자신의 씨를 뿌리고 영미라는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사내들이 쉬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집창촌에 칼을 들고 뛰어든 동생 영남이. 만약 거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도 된다면 아마도 바로 앞에서 혀를 빼고 땀을 흘리는 이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경철은 영미가 가끔씩 맞이하는 삶의 고비 때마다 수호천사처럼 나타나 도움을 준 해결사였다. 영미는 전화기를 꺼내 살핀 뒤 경철에게 소주 한 병을 더 달라고 말했다. 둘이서 나눠 마시긴 했어도 이 정도 양이면 취기가 올라야 하는데 오히려 멀쩡하게 느껴졌다. 경철이 영미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말을 붙였다. “너 무슨 일 있지? 이 시간에 와서 술 퍼마시는 것도 그렇고 전화기 자주 들여다보는 것도 그렇고. 혹시 어떤 놈팽이에게 채인 것 아니냐?” 영미가 눈을 흘겼다. “놈팽이는 오빠 하나로 충분해.” “지랄, 고마워서 눈물 난다. 무슨 일이야, 말해봐. 너 암만해도 또 호빠 선수한테 물린 것 같은데.” “아, 놔, 내가 호빠 끊은 지가 언젠데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그래.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저기 가서 거울 좀 봐라. 얼굴에 얼마나 수심이 가득한지.” 경철이 카운터 쪽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한 쌍의 남녀가 찬바람을 이끌고 들어왔다. 경철이 손님을 구석 자리로 안내하는 동안 영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빼꼼하게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가로등 불빛 주위로 성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문득 은지가 혹시 자다가 일어나 놀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경철이 돌아오자 영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약간 고민이 있기는 해. 지금 내 친구가 대타를 치고 있거든.” “그게 무슨 문제야. 다들 그렇게 대타 치잖아.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 알겠다. 고바야시가 생리 중임에도 불구하고 너를 원했는데 네가 다른 아가씨를 들여보냈다. 그 때문에 고바야시가 뿔이 났다. 이런 스토리지? 맞지?” 손님들이 손을 들었다. 경철이 주문을 받으러 가자 영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지갑에서 지폐 석장을 꺼내 금고 위에 올려두고 돌아왔다. 경철이 곧 지폐 두 장을 가져와 영미 지갑에 넣어주며 꿀밤을 주었다. 꿀밤은 청춘에서 영미가 혼자 술을 마실 때의 비용은 언제나 맥시멈 만원이라는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이었다. 영미가 머리를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타 친 친구가 다찌가 아니라서 문제. 그냥 일반인이거든.” 갑자기 경철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가시었다.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사실을 장 마담도 아느냐고 물었다. 영미는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경철은 손님에게 맥주와 마른안주를 가져다주고 돌아와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느냐고 불뚝성을 냈다. 영미는 경철의 눈치를 살피며 뜻하지 않게 일이 꼬였다고 대꾸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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