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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4.03 03:1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3)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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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3)
바람의 기억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경철은 국에 밥을 말아서 영미 앞으로 밀었다. 
   “하는 수 없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쨌거나 참 대단하다, 너나 그 친구나.” 
   영미는 목을 축이는 고양이처럼 몇 차례 깨작거리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어. 근데 이건 아무래도 우리 우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 약간 머리가 복잡해.”
   “머리가 복잡하다, 그럼 뭔가 목적이 있다는 거냐? 예를 들자면 성적인 호기심이 발동해서 생긴 일탈적인 행동이라든가.”
   “말을 뭐 그리 어렵게 하냐 두통 생기게. 그런 건 아니고. 내 느낌으로는, 틀리면 좋겠지만, 얘가 혹시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얼마 전에 실직을 한 데다 딸내미 수술비도 필요하거든.”
   “뭐? 애가 있어? 아가씨가 아니고?”
경철이 불쑥 언성을 높이자 구석 손님들의 시선이 이편으로 쏠렸다. 영미가 경철의 입을 손으로 가볍게 툭 치고는 손님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경철이 목소리를 낮춰서 다시 말했다.  
   “너희 둘 다 미치지 않았냐? 남편이 알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왜 그렇게 흥분부터하고 난리야. 아무려면 우리가 그만한 분별력도 없을까. 애가 있으면 꼭 곁에 남편이 있으란 법 있어? 그건 걱정 마. 지금 당장 혼날 일은 없으니까.”
   그때 귀에 익은 음악이 울렸다.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본 영미가 화들짝 놀랐다. 기대했던 정아의 전화가 아니었다. 얼른 휴대폰 창을 경철에게 보여주었다. 경철의 표정도 굳어졌다. 어떻게 하지? 영미가 벨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해라. 나중에 알게 되면 일이 커질 수 있어.” 
   장 마담은 일을 나간 아가씨들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가 드물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늦은 시간은 더욱 그러했다. 영미는 휴대폰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와 연결했다. 가늘고 높은 장 마담 특유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너 어디야? 바람 소리 요란한 걸 보니 호텔은 아닌 것 같고.”
   “그러잖아도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언니!”
   영미는 두 손으로 전화기를 감싸며 대답했다. 저편 목소리에도 바람소리가 섞여있었다. 영미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기회에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때 누군가가 영미의 어깨를 툭 쳤다. 순간 영미는 어머나, 하고 소스라치며 전화기를 놓쳤다. 
   “이년이 왜 이리 경기를 일으키고 난리야. 내가 귀신처럼 보이니?”
   갑작스런 장 마담의 출현에 영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장 마담이 앞장서서 가게로 들어갔다. 영미는 그제야 눈 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 경철도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장 마담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전화하신 거예요?”
   경철이 묻자 장 마담이 목도리를 풀며 말했다.  
   “집에 가는 길에 이년 좀 족치러 왔다.”
   영미가 불안한 눈빛으로 장 마담의 표정을 살폈다. 장 마담이 자리에 앉아 영미를 째려보았다. 
    우리 영미 많이 컸더라. 이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걸 보니.” 
   영미는 조아리듯 허리를 굽혔다. 장 마담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영미는 머리가 멍해졌다. 장 마담이 대타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영미는 대타 사실을 보고 하지 않은 점에 대하여 사과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 마담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라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나도 한 잔 주렴.”
   경철이 새 잔을 가져와 장 마담에게 건네고 술을 따랐다. 새로 안주를 준비하겠다고 일어서는 경철을 장 마담이 끌어 앉혔다. 
   “내가 우림각 일을 손바닥에 놓고 보고 있다는 걸 잊었니? 오늘 영미 일 처리는 대 실망이야.”
장 마담이 술잔을 들이켰다. 경철이 잔을 채워주며 그러잖아도 방금 얘기 듣고 혼내고 있는 중이라고 거들었다. 영미는 장 마담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서 더 불안해졌다. 
   “대타 친 걸 나무라는 게 아니야. 사정이 생기면 대타는 당연한 거지. 문제는 어떻게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우림각 일을 일반인에게 맡길 수가 있느냐는 거다. 그러다 사고라도 터지면 누가 책임을 질 거야.”
   영미는 장 마담이 정아가 대타를 치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을 아는 이는 당사자인 정아와 고바야시 그리고 조금 전 이야기를 들은 경철이 뿐인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장 마담의 태도로 보아 상당한 벌칙이 내려질 것 같아 영미는 초조해졌다. 느낌 상 일주일 이상의 ‘영업정지’ 처분은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열흘 이상 일감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미는 적극적인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늘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그리 되었거든요. 벌을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근데 오늘 상황을 제가 간단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장 마담이 잔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미는 낮에 있었던 일들을 시간대별로 설명했다. 물론 정아가 유부녀라는 사실은 넣지 않았다. 처음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던 장 마담이 고바야시가 먼저 정아를 원했다는 부분에 이르러 바짝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미가 얘기를 마칠 즈음 장 마담의 굳어있던 표정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영미는 거듭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영미 주연이 아니라 고바야시 상이 주도한 셈이구나. 어쩐지 고바야시 입이 귀에 걸려있어서 이상하다 했지.”
   “고바야시 상을 만났어요? 어디서요?”
   영미가 톤을 높여 물었다.
   “내가 말했지, 이 바닥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오다가 빠에 들렀다.” 
영미는 그제야 퍼즐을 맞춘 기분이 들었다. 장 마담은 고바야시와 정아가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런데 정아가 다찌가 아니라는 것을 장 마담은 어떻게 알았을까. 천하의 장 마담이라 해도 다른 업소의 아가씨까지 다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영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경철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무튼 오늘 일은 누님이 선처를 좀 해주시지요.”
영미도 얼른 손을 비비며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허리를 접었다. 그러고는 장 마담 뒤로 가서 마담의 양 어깨를 주물렀다. 
   “이년은 비위도 좋고 애교도 많아. 오빠에게 벌써 약을 써 둔 모양이지?”
갑자기 분위기가 좋아졌다. 장 마담이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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