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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4.25 21:25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6)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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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6) 바람의 기억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그때 병원으로 직접 문병을 온 회장님이 내 손을 다정하게 잡고 그러셨지. 이런 징하게 이쁜년, 넌 이런 두둑한 배포와 비전을 가지고 어쩌자고 가시내로 태어났느냐. 애석하다, 애석해. 고추 달고 나왔으면 틀림없는 내 오른팔인데 말이야.” “와, 강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럼 언니는 사내였으면 깡패가 될 뻔했네요.” 영미의 말에 장 마담이 부러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우림각 설립자인 강만돌 회장은 이 지역 주먹계의 대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자유당 시절 정치와 폭력조직이 특별한 상생(相生)관계였을 때 중앙에는 이정재 라는 걸출한 정치깡패가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경호를 책임지던 경무관 곽영주와 의형제를 맺고 위세를 떨쳤는데 강만돌은 바로 그 동대문파 보스인 이정재의 똘마니 조직원이었다. 그가 조직 생활에 막 적응할 무렵 자유당 정권을 마감하게 한 4.19의거가 일어났고 이듬해 5.16 쿠데타가 터져 군부가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이때 보스급 정치깡패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강만돌은 자파의 보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 손에 수갑을 차고 가슴에 커다란 이름표를 붙인 채,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배경으로 본보기 거리 행진을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뇌리를 쳤다. 그는 그길로 조직 생활을 접고 고향인 섬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는 폭력 조직에 직접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지만, 고향의 후배 주먹들은 그의 전력을 높이 사 지역의 제일 큰 어른으로 대우했다. 그는 그런 환경을 발판으로 유흥가를 움직이는 큰손 노릇을 하며 지역의 사업가로 변신에 성공했고 나중에는 정부의 관광활성화 대책이 발표되자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특화된 유흥업소를 제일 먼저 설립해 특수를 누렸던 것이다. “회장님이 가시면서 봉투 하나를 우리식으로다가 브래지어 속에 쑥 넣어주셨지. 나중에 보니 그게 병원을 열 번은 더 들락거려도 남는 큰돈이어서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 통이 크다는 걸 들었지만 그처럼 클 줄은 몰랐다.” “그때 이미 회장님이 언니를 우림각 책임자로 찜하고 그러신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즈음 초대 책임자였던 박 마담이 커미션과 관련된 비리를 저질러서 회장님 심기가 불편하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으니까. 아무튼 요즘도 회장님을 만나면 내가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서 인사를 하잖니. 그 인사법이 바로 그 병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배가 나와서 전처럼 허리가 확 꺾이지는 않지만.” 손으로 배를 쓰다듬는 장 마담의 행동에 영미와 경철은 웃음을 터트렸다. 장 마담이 영미의 잔을 채워주고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참, 오늘 말이다, 빠에서 아주 인상적인 모습을 봤지 뭐냐. 마치 30년 전의 내 모습과 비슷한.” “그리 독해 보이는 사람이 있던가요?” 경철이 농담을 건넸다. “이 녀석도 영미를 닮아가네. 내가 어때서. 알고 보면 누나야말로 천사지. 아무튼 그 아이가 술잔을 앞에 놓고 수줍게 웃는데 그 이면이 어찌나 투명하게 비치는지, 한참이나 눈여겨보았다.” “언니도 수줍던 시절이 있었어요?” “이년 보게. 초짜 때 내가 얼마나 다소곳했는지 알아? 아무튼 그 아이는 나름 표정관리를 하는데 내 눈에는 세상의 근심 걱정을 온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게 그대로 보이더라.” 장 마담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르다보니 이제 사람을 보면 그 내면까지 그대로 보인다. 아무리 잘 꾸미고 나타나도 아, 저 사람에게는 사기꾼의 피가 흐르고 있다. 저 사람은 삶이 계속 암울하겠구나 싶은 느낌이 딱 오지. 용한 점쟁이처럼 말이야.” “우와, 정말요? 미래까지 보여요? 언니, 저도 좀 봐주세요. 복채는 섭섭하지 않게 드릴 게요.” 불쑥 얼굴을 앞으로 내미는 영미를 장 마담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영미 관상은 나쁘지 않아. 네가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을 갈 수 있다.” “진짜요? 아이 좋아라! 오빠 들었어? 그럼 어떻게 하면 백마 탄 낭군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자, 복채 받으시고요.” 영미는 채운 잔을 장 마담에게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 “거야, 어렵지 않다. 우리 영미가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야. 고급 양주 실컷 퍼마시고 남자들 많은 곳으로 가서 궁둥이 까고 시원하게 오줌을 누면 된다.” 영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경철이 웃음을 터트리며 영미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고바야시 대타 친 그 아이 말이야. 아주 참해 보이던데 너랑은 어떻게 아는 거냐?” 장 마담이 웃음기를 거두며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아, 정아 말이군요. 그러면 혹시 아까 말씀하신 그 아가씨가 바로.” “맞다. 그 아이가 우리 영미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를 딱 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물었지. 혹시 영미를 아느냐고.” “아, 그러셨구나.” “얘가 어찌나 당황하는지, 내가 단속 나온 여경으로 보였나봐.” “에이, 누가 언니를 경찰로 보겠어요. 그나저나 언니 마음에 꼭 들었나 봐요. 예쁘지요? 내 친구 맞아요. 원래는 제게 일본어를 가르쳤거든요, 나 초짜 때 학원에서. 동갑이어서 나중에 친구 먹은 거고요.” “아하, 그래서 일본어를 그렇게 고급스럽게 썼구나. 그런데 그런 애가 왜 영미 대타를 쳤을까? 우리에게는 그게 수입원이고 일상이지만 그 아이 입장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과제잖아.” “저도 그게 궁금해요.” 영미가 정아의 사정을 자세히 얘기할까 주저하는 사이 장 마담이 다시 말했다. “궁금할 게 뭐 있니. 얼굴에 써 있다니까. 나는 다찌가 되어야겠어요, 라고.” “정말요?” “그렇다니까. 두고 보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인과관계로 쉽게 설명된다. 모든 결과에는 그만한 원인이 있는 거지.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따지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그런 면에서 친구가 선뜻 대타를 친 것은 우정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는 게 분명해.” 단정적인 장 마담의 진단에 영미는 소름이 돋았다. “어쨌거나 우리 영미 분발해야겠더라. 고바야시가 그 친구에게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렸어. 고바야시 표정으로 보아 속궁합도 좋았던 모양이고.” 장 마담이 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 마디 더 보탰다. “참, 내일 그 친구와 점심 약속을 했다. 너도 나오너라. 1시에 저기 오거리 일억조식당이야.” 영미와 경철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출입문 밖까지 나가 장 마담을 전송했다. 멀어지는 장 마담의 자그마한 체구 뒤로 흰 발자국이 바삐 따라붙었다. 바람이 잠잠해졌고 성긴 눈발도 한결 뜸해졌다. 영미는 테이블 위의 그릇과 잔을 치워 주방으로 건네주며 일이 참 이상하게 꼬였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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