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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6.03 19:45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0)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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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20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와, 소름 돋는다. 나라면 10분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정아는 들끓는 바다를 바라보며 몸서리를 쳤다. “성질 급한 나는 아마 바로 꼴까닥했을 거야. 생각해봐. 우리가 수영장에서 바닥인가 싶어 발을 뻗었을 때 아래로 쑥 내려갈 때의 그 느낌말이야.” “맞아, 그 짧은 순간에도 공포가 밀려드는데... 근데 저렇게 시퍼렇게 뒤집어지는 바다에서 사흘을 버티다니.” 두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동안 말없이 먼 바다를 응시했다. 방파제를 강타한 파도가 하얗게 부서져 높이 날아올랐다. 바람을 타고 도로까지 날아온 포말들이 지나는 자동차를 덮쳤다. “사람이 살겠다고 이 악 물면 못할 일이 없는 것 같아.” 영미의 혼잣말에 정아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와 영미는 손을 잡고서 나란히 계단을 걸어 내렸다. 2층 계단참을 돌던 영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장 마담이 너를 보자고 한 이유를 짐작하겠지?” 정아는 영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 판단이 서질 않으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이 바닥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늪이야. 일단 발을 들이면 돌아 나오는 건 불가능해. 이게 아니구나 싶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빨리 더 깊게 빨려들고 말지.” 정아는 영미가 지금 자신의 심정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놀랐다. 그러잖아도 정아는 어제 장 마담과 약속을 정한 이후 자신의 머릿속은 온통 우림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다시 룸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도 심지어 고바야시와의 정사 중에도 장 마담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영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간밤에 장 마담에게 너에 대한 정보를 딱 한 가지만 얘기했다. 너는 내 일본어 선생이자 친구라는 것. 그러니 혹시 우림각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이따 만나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부러 말하지 않아도 돼. 예를 들자면 네가 돌아온 싱글이라는 거나 아이가 있다는 것 같은. 우림각 아가씨 중에 돌아온 싱글은 여럿 있지만 아이가 있는 경우는 들어 보지 못했으니까.” 정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미가 정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둘은 거리로 나섰다. 한낮인데도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다. 가끔 손님을 태운 택시가 다가와서 목적지를 묻고는 이내 내달렸다. 둘은 택시가 오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며 교차로까지 나왔다. “우림각도 나이 제한 같은 게 있지 않니? 아가씨 뽑을 때.” “그럼 있지. 아무리 고와도 할머니는 안 된다.” 농을 친 영미가 이를 하얗게 드러냈다. 정아가 눈을 흘겼다. “우리나라 오빠들은 룸싸롱 가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예쁜 영계만 찾지. 근데 우림각에 오는 일본 손님들은 전혀 그러질 않아. 파트너 초이스하는 걸 보면 꼭 미모나 어린 순으로 뽑혀나가질 않거든. 자기 좋아하는 스타일 찾아서 얼굴도 몸매도 엉망인 아가씨가 제일 먼저 선택되는 일이 흔해.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말이야.” 멀리서 택시 한 대가 속도를 높여 달려왔다. 영미가 손을 들었다. “장 마담이 너에게 관심을 가진 건, 음... 너는 예쁜 데다 일본어 유창하고 교양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 사실 좀 퀄리티가 높은 손님이 왔을 때 접대할 인재가 없다고 항상 아쉬워했거든.” 영미가 택시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꽃다발에 눈길을 주는 기사에게 영미가 식당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 분 인상이 좋더라. 목소리도 맑으시고.” “누구? 장 마담? 표정이야 천사지. 하지만 별명이 저승사자야. 이 바닥의 전설이 된 사람인데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겠니. 포장술이라고 할까, 그게 뛰어나. 자기 관리 철저하고 통도 크고.” 불현듯 영미가 손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는 않겠다. 장 마담은 특이하게도 약속 시간을 어기면 그냥 어금니로 물어뜯고 싶어 해. 특히나 무단결근을 하거나 지각하면 가차 없지. 바로 벌금 물리고 다음 날 불이익을 주거든.”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차창을 통해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아침보다는 잠잠한 편이었다. 큰길에는 눈이 없지만 이면도로의 길섶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희끗희끗 빛났다. “유식한 너랑은 코드가 잘 맞을 거야. 마담언니 가방 끈은 길지 않아도 유식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흐르니까. 지금도 시간만 나면 책을 끼고 살아. 그래서 어떤 손님이 와도 뻥 좀 섞어서 48시간 정도는 대등하게 썰을 풀 수 있을 정도로 청산유수에 만물박사지.” “그래서 우림각의 전설인 모양이구나.” “가시내, 전설이 그렇게 책 읽어서 될 것 같으면 나도 내일 당장 도서관으로 출근하겠다. 우리의 전설은 그렇게 시시하지 않아. 차차 알게 될 거야. 얼마나 흥미진진한 인물인지.” 구 시가지를 벗어난 택시는 공항로를 지나 막 신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눈에 익은 건물들이 하나 둘 빠르게 다가왔다가 이내 뒤로 밀렸다. 택시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영미가 문득 손짓으로 식당 앞 주차장을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어머, 저거 장 마담 차야. 둘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주차를 마친 장 마담이 영미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었다. 정아와 영미는 식당 입구에 나란히 섰다. “어제 인사 드렸지? 우리 우림각의 자랑이신 장 마담님이셔.” 정아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다음 허리를 반쯤 접어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장 마담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정아는 들고 있던 꽃을 왼손으로 바꿔 잡고 얼른 오른손을 내밀었다. 영미가 다시 재재거렸다. “아까 오면서도 말했지만 우리 마담언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자 닮고 싶은 분이야. 우리 우림각의 태양이자 잔 다르크시지!" “이년 또 지랄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자, 들어가자.” 장 마담이 앞장을 섰다. 종업원이 반기며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정아는 자리에 앉은 장 마담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것을 기다렸다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걸 어찌 알고 이렇게 이쁜 장미를 가져오셨나? 고맙구만.” 장 마담의 얼굴이 환해졌다. 영미가 정아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장 마담이 꽃을 코에 대고 말했다. “꽃은 언제 봐도 좋아. 나도 한 때는 이런 꽃 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언니는 지금도 꽃이세요.” “이년 거짓말도 이쁘게 하네. 나 같은 아줌마에게 꽃이라는 말은 욕이야.” 눈치를 살피던 정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영미 말이 맞아요, 정말 고으세요.” 장 마담이 손사래를 쳤다. “그리 후하게 봐주니 고맙네. 근데 사실 꽃에 코를 대고 이렇게 킁킁 냄새를 맡는 건 꽃에게는 굉장히 실례고 민망한 짓인 거 알아? 꽃 입장에서 보면.” 정아와 영미는 장 마담의 말뜻이 뭔지를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꽃은 식물의 성기잖아. 근데 그걸 코에 대고 냄새까지 맡으면 꽃이 부끄럽고 불편하지 않겠어?”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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