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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07.02 22:46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4)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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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기억(24)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뭔가 위태위태한 느낌이랄까. 그런 게 정아의 표정에서 설핏설핏 보였거든. 특히 웃을 때 말이야. 사람이 웃을 때 필요한 근육 수가 17개라고 하잖아. 찡그릴 때 쓰는 건 그 두 배가 넘는 43개이고. 근데 정아 웃는 걸 보니까 웃는 근육 몇 개가 빠지고 오히려 찡그릴 때 쓰는 근육을 쓰는 것처럼 보였거든. 입으로는 분명 웃고 있는데 눈매 쪽은 서늘한 거야. 마치 슬픔의 그림자가 잔뜩 고여 있는 것처럼.”
   “아, 그래서 그런 건가. 저도 어제 오랜만에 우리 정아를 보면서 좀 쓸쓸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영미의 지적에 정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아는 지난 밤 장 마담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 장 마담은 고바야시와의 대화중에도 무시로 시선을 이편에 주곤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수사관의 눈빛 같아서 부담을 느꼈었다. 
   “아무튼 정아가 우리 영미 생리로 인한 펑크를 잘 막아준 노고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밥 한 끼 사는 거니까 다른 부담은 갖지 마.”
   정아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종업원이 와서 각자의 보조접시에 고기를 옮겨주고 불판을 갈아주었다. 영미가 장 마담의 잔에 맥주를 채우며 말했다.  
   “전 또 언니가 이런 특별대우를 하셔서 혹시 정아를 우림각으로 부르려고 그러는 건가 했지요.”
   영미의 말에 장 마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편한 시선으로 정아를 바라보다가 고기에 부추를 더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씹을 때마다 종 모양의 귀걸이가 소의 풍경처럼 흔들렸다. 
   “개인적으로 욕심이야 나지, 이젠 우림각도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거든. 젊은 몸, 예쁜 얼굴로 손님을 끄는 시대는 지났으니까. 이제는 몸과 더불어 마음을 사로잡는 마케팅이 필요한 때가 된 거지. 단순히 몸만 파는 것으로는 경쟁력이 없어. 이젠 마음까지 사로잡아야 해. 그러자면 대화가 필요하고 대화를 하자면 상식도 풍부하고 일단 일본어가 유창해야 하지. 그런 점에서 정아처럼 예쁘고 제대로 공부한 애들이 절대 필요한 건 사실이야.”  
   영미가 부러 주눅이든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 테이블에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소란해졌다. 장 마담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부들이 점심시간에 저렇게 떼로 식당이며 카페로 몰려다니는 곳은 아마 우리나라뿐일 거야. 다들 남편 잘 만난 여자들이구먼. 얼른 봐도 팔자가 늘어졌어.”
   정아는 외투를 벗고 있는 대여섯 명의 여자들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화들짝 놀랐다. 여자들 뒤편 저만치 통로에서 이편을 노려보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매서운 눈매가 정아를 포함한 세 사람을 천천히 쓰윽 훑었다. 돌아서는 사내의 마지막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비웃음과 화가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정아는 출입구로 향하는 미친개의 뒷모습을 가슴을 조이며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돌아서서 다시 올 것만 같았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았지?”
   장 마담이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일본어로 말했다. 옆 테이블에 말이 건너가는 걸 막자는 의도일 터였다.  
   “우림각에도 정아 같은 아가씨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영미도 비교적 정확한 일본어로 대답했다.  
   “맞다. 나 역시 정아가 탐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우림각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버는 곳이 아니고 그저 성을 팔아 외화벌이를 하는 곳에 불과하니까 선뜻 권하기 힘든 딜레마가 있다. 아무리 고상하게 포장해도 우림각은 몸을 파는 곳이잖아.” 
   “에이,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잖아.”
   영미의 말을 장 마담이 한 마디로 잘랐다. 정아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얽혔다. 장 마담의 시선이 다시 정아를 향했다.   
   “참, 정아에게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어제 영미를 대신해서 고바야시를 접대했잖아? 그게 순전히 영미와의 우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말해 줄 수 있니?”
   정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물음이 우림각에서 일할 생각이 있느냐는 우회적인 질문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정아가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테이블 위에 둔 전화기에 불이 들어와 깜빡거렸다. 장 마담이 턱짓으로 받아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아는 주저하다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고는 몸을 틀었다.  
   “오호, 아주 졸나 흥미로워. 면접을 우림각 마담에게 보다니...”
   미친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아는 이따 연락하겠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아는 전화기를 백에 넣고 자세를 고쳤다. 미친개가 장 마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혹시 만나는 남자 있어?”
   당황해하는 정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 마담이 고기 한 점을 집어 들며 물었다. 정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아는 사람의 전화라고 얼버무렸다. 곁에서 영미가 지난 5년 동안 영미는 숫처녀나 다름없었다고 엉너리를 쳤다. 장 마담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럼 어제 고바야시가 땡잡은 것이냐고 농을 건넸다. 
   장 마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쯤에서 내가 정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게. 뭐, 정아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어제 영미 대타를 친 것으로 봐서 우리 우림각 일에 배타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들거든. 또 뭐랄까 음....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덕분에 아가씨들을 보면 우리 쪽으로 올 사람인지 아닌지가 보이는데.”
   “우리 정아도 올 것 같은 가요?”
   영미의 목소리가 올라간 탓에 옆 테이블의 시선 일부가 이쪽 테이블로 쏠렸다.   
   “그렇게 보이긴 해.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정아가 왜 그렇게 보이는지가 중요하지. 금껏 우림각 아가씨들 하나하나에게는 다들 우림각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나 사정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만약 정아가 우림각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 첫째 이유가 뭐냐는 거지.”
   “결국 돈이지요, 뭐.”
   정아를 바라보며 영미가 말했다. 정아는 말없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장 마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림각에서 일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아가씨들 열에 아홉은 가난이 지겨워서 왔다고 해. 그러면 내가 그렇게 말하지. 내가 알기로, 너는 빚 때문에 온 거잖아? 그러면 또 그러지. 그게 그거지요. 가난이 빚이고 빚이 가난이잖아요. 그럼 내가 욕설을 퍼부어. 정신 차려 이년아, 빚은 가난해서 지는 게 아니야. 빚은 오히려 부자들이 더 많은 거 몰라. 정말 가난한 사람은 오히려 빚이 없어. 네가 쓴 것은 빚이 아니라 사채야. 빚이 빛을 찾아가는 추가비용이라면 사채는 시체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아야 해 이것아!”
   영미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장 마담이 의아한 표정으로 영미를 흘겨보았다. 영미가 저도 룸싸롱에서 우림각으로 옮길 때 언니에게 똑같은 욕을 들었다고 말했다. 정아는 장 마담이 사채를 썼느냐고 물을 까봐 조마조마했다. 정아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까 미친개가 서 있었던 지점을 바라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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