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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7.10.23 00:15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39)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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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밤의 꽃
정아가 울면서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병원에서 친자 확인 검사를 받겠다고 해도 그저 손만 내저을 뿐이었다. 정아는 인수의 출가한 누이를 수소문해서 찾아갔으나 거기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누이는 어머니 보다 오히려 더 지독하게 굴었다. 은지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아이를 이용해서 유산을 노리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정아는 더는 인수 집을 찾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은지 돌 때 다시 한 번 용기를 냈지만 대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지를 않아서 발길을 돌렸다. 분명 누군가의 슬리퍼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왔고, 이어 안에서 슬리퍼에 대고 누가 왔느냐는 물음이 있었는데도 결국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아는 슬리퍼가 안에 대고 하는 말을 곱씹으며 다시는 이 집을 찾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걸레가 애 팔러 왔네요!’ 그것은 인수 어머니 목소리 같기도, 누이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정아는 교도소로 이어진 길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철규 선배의 남은 형량을 생각했다. 어림셈으로, 아직도 4년 이상은 남은 것 같다.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는 상상을 하자 몸이 떨려왔다. 철규 면회를 다녀온 학과 선배들은 정아에게 너도 철규에게 면회를 가는 게 도리라고 말하곤 했다. 철규가 인수를 칼로 찌른 우발적인 행동이 따지고 보면 너로 인한 사건이니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한번 만나고 오라고 충고했다. 결자해지라니. 내막을 모르고 해대는 그들의 조언에 정아는 매번 상처를 입었다. 철규 선배는 수감 초기부터 수차례 편지와 인편을 통해 면회를 와달라고 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너를 사랑한 것뿐, 오늘도 너를 생각하며 오직 출감만을 손꼽고 있다.’ 라는 식의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왔다. 어느 날은 혈서를, 어느 날은 자신의 음모를 편지지에 붙여 보내오기도 했다. 편지는 아마 지금도 전에 살던 집으로 꾸준히 오고 있을 터였다. 정아는 그런 그의 집착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가 출감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서 가능하면 그가 나오기 전에 이 섬을 떠나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반대편 차로에 검정 승용차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은지가 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며 전화기가 운다고 말했다. 정아는 건네받은 전화기를 손에 들고서 승용차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영구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새로운 장례 행렬 같지는 않았다. 정아는 혹시 저게 미친개 조직을 치러 가는 다른 조직의 행렬인가 싶어 고개를 빼 차량의 숫자를 셌다. 모두 8대의 대형승용차가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버스를 지나쳤다. 차마다 하나 같이 창문이 짙어 실내가 캄캄했다. “전화를 왜 이리 늦게 받아.” 영미의 새된 목소리가 귀청을 쳤다. 정아는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가 다시 붙이며 어디냐고 물었다. 영미가 한탄조로 대꾸했다. “에고, 운 없는 년은 혼숙을 해도 꼭 고자 옆에 눕는다더니 지금 내 꼴이 그렇다.” 정아가 ‘혼숙을 해도’가 아니라 ‘봉놋방에 누워도’라고 해야 정확한 속담이라고 지적을 하려는데 영미의 말이 이어졌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오늘 오랜만에 이모네 집을 갔었어. 왜 그 사거리에 쌈밥 잘 하는 식당 말이야. 거기서 맛있게 밥 먹고 화장실을 들렀는데, 문제는 거기서 발단이 된 거야. 그것 때문에 파출소까지 왕림하느라 너랑 우림각 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정아는 상관없다며, 덕분에 은지랑 외식도 하고 추모관에도 들렀다고 자랑했다. “근데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파출소까지 간 거야?” 정아가 묻자 영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아이참, 생각하니 또 열 오른다. 글쎄 식당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 아래에 웬 지갑이 떨어져 있는 거야. 그래서 오줌 누고 주워서 가지고 나왔지. 주인 찾아주려고. 근데 마침 카운터 앞에서 한 아줌마가 지갑을 잃었다고 울상을 짓고 있었어. 그래서 혹시 이 지갑이냐고 물었지. 처음에는 여자가 반색을 하며 받더라, 그런데 지갑을 열어보고는 나를 노려보는 거야. 현금이 전부 없어졌다고 하면서” “저런! 너한테 혐의를 씌운 거구나.” “그렇지. 너라면 안 돌겠니? 분위기가 딱 그랬어. 내가 설명을 해도 경찰을 부르네 어쩌네 하면서 나를 도둑 취급하는 거야. 뚜껑이 열리잖아. 그래서 내가 사정없이 퍼부었지. 경찰이 왔을 때는 육박전 직전까지 갔다니까.” “열 받을 만하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니.” “바로 그거야. 그건 그렇고 마담 언니가 지금이라도 너 데리고 우림각으로 들어오란다. 내일부터 정식출근하려면 우림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한대.” 영미의 말에 정아는 은지를 집에 데려다 주고 바로 우림각으로 출발하겠다고 대답했다. 정아는 우림각 정문 건너편의 미용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미용실 의자는 모두 비어있었다. 정아는 쪽문을 통해 우림각 안을 살폈다. 아가씨들은 이미 출근을 끝낸 듯 중앙의 출입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우림각을 쳐다보았다. 독립기념관의 부속 건물처럼 보이는 이 우람하고 위풍당당한 한옥이 성매매를 위해 입국한 일본 남자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라는 게 아직은 실감나지 않았다. 낮 동안 말갛게 빛을 내던 겨울 해가 서녘으로 기울면서 북쪽에서 구름이 밀려들었다. 다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와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고드름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우두둑 소리를 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중앙 출입문이 열렸다. 한복을 입은 아가씨 한 명이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는 모양새로 보자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나왔다. 그녀가 이편을 보며 손짓을 해서야 정아는 한복의 주인공이 영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 그렇게 입으니까 새타령 부르는 가수 같다.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나 얼어 죽는 줄 알았잖아.” 정아가 쪽문으로 들어서며 발을 동동 굴렀다. “네가 입을 한복 좀 챙겨오느라고. 일단 우림각에 입장하면 아가씨들은 무조건 한복을 입어야 하거든.” 영미가 정아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영미는 밤 마실 나갔다 돌아오는 처녀처럼 살며시 출입문을 열고 마루로 올라섰다. 긴 마루를 까치발로 걷던 영미가 중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은 조회 중이니 오늘은 여기서 갈아입자. 들고 온 보자기를 풀며 영미가 말했다. 정아는 꺼낸 저고리와 치마를 양 손에 들고서 탄성을 질렀다. “어머, 이거 녹의홍상(綠衣紅裳)이잖아. 너무 예쁘다!” 영미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정아는 이게 신부들이 예복으로 입는 연두색 저고리와 다홍치마라고 설명해주었다. 치마와 저고리를 몸에 대보던 정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속곳이랑 단속곳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영미가 눈을 흘기며 여기가 폐백 올리는 자리냐고 나무라고는 갑자기 자기 치맛단을 잡아 위로 획 들어올렸다. 엉겁결에 영미의 치마 속을 본 정아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설마 너 이런 홑치마 차림으로 나가는 건 아니겠지?” 다그치듯 묻는 정아의 말에 영미가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놀라기는. 여긴 몸이 재산이고 무기잖아. 여기 아가씨들 중에 노 팬티로 치마만 두르고 연회장으로 가는 애들 많아.” “망측해라. 정말?” “그렇대도. 걔들은 연회 중에 자기 파트너 손 살짝 잡아 끌어서 치마 속으로 넣어준다고. 은밀한 거기에 손길이 닿는 순간부터 그 손님은 반쯤 정신이 빠져서 해롱거리는 거지. 그럼 나중에 쇼핑 나가서 씀씀이가 달라지거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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