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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1.08 01:41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48)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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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48회)



                                   바람의 기억


5. 밤의 연가

까불린 눈발이 나비 떼처럼 바람에 휩쓸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아가씨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창문 앞을 지나갔다. 아가씨의 미끈한 종아리가 코트 자락 아래에서 차갑게 빛났다.   
“왜 가타부타 반응이 없어? 숙녀의 정중한 데이트 요청에, 그렇게 비싸게 놀 거야?”
영미가 유리에 붙은 눈송이를 겨냥해 창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횟감 손질을 끝낸 경철이 칼등으로 도마를 쓸어내며 대꾸했다. 
“좋지, 데이트! 날씨가 이러니 올 손님도 없을 테고. 오늘 밤 둘이서 꼭지가 돌도록 빨아보자.”
경철의 흔쾌한 대꾸에 영미가 팔을 들어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보였다. 경철도 영미를 따라했다. 손에든 칼이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아유, 사시미칼로 하트를 만드니 것도 멋지네. 뭐랄까 목숨이 걸린 사랑처럼 장엄하다고 할까.”
경철이 씽긋 웃으며 칼을 탕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나무도마 깊숙이 칼날이 박혔다. 칼자루가 가볍게 떨었다. 순간 영미는 엄습하는 섬뜩함에 얼른 눈길을 돌렸다. 경철이 돛단배 모양의 나무접시에다 회를 가득 내왔다. 영미가 박수를 치면서도 이걸 우리 둘이서 어떻게 다 먹느냐고 타박했다. 경철이 제 배와 영미의 복부를 가리키며 문제없다고 둘러댔다. 둘은 마주보고 앉아 서로 소주잔을 채워주고는 잔을 부딪쳤다. 영미가 거푸 석 잔을 비웠다. 경철이 천천히 마시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까 오빠가 도마에 칼을 꽂는 순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섬뜩했어. 어떤 새끼들의 면상이 불쑥 떠올랐거든.”
영미가 스스로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칼? 내가 너무 터프했나? 새끼들이라니?”
경철이 회에 초장을 듬뿍 찍어 건네며 물었다. 영미가 입을 벌렸다.  
“있어, 개 같은 새끼들.”
영미가 회를 오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뇌리에 낯이 익은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꽁지머리였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의 서늘한 여운이 얇은 귀를 지나 마침내 꽁지머리로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냉정한 인상의 사내. 그가 영미의 목에 반짝이는 잭나이프를 들이댔다. 술과 잠에 취해 있던 영미는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사내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고약한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한 나머지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고약한 입 냄새가 훅 끼쳤다. 영미는 사내를 밀쳤다. 사내의 검고 도톰한 입술이 씰룩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뺨을 갈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리를 지르자마자 잭나이프의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이 목에서 느껴졌다. 곧 옷이 벗겨졌고 이어 사내의 몸이 영미의 하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영미는 도리 없이 흔들리며 공포에 떨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간밤에 남자 셋과 술을 마셨다. 그중 하나는 어제 역전 버스정류장에서 인사를 나눈 또래 남자로 그 자리에서 바로 친구가 된 사이였고, 나머지 둘은 나중에 그 친구가 부른 그의 친구들이었다. 귀엽게 생긴 외모에 매너도 괜찮은 세 남자와의 데이트에 영미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무료해서 무작정 집을 나와 기차에 오른 영미로서는 꽤나 근사한 만남과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둘은 오락실에 들러 디스코 팡팡으로 몸을 푼 다음 맥도날드로 가서 햄버거를 먹었고 거기서 친구들과 합류했다. 넷은 택시를 타고 중심가의 놀이시설로 가서 해가 기울 때까지 기구를 탔다. 그러고는 시내를 누비며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웃고 떠들었다. 밤이 깊어가자 나이트클럽으로 가서 춤을 추었다. 이런 신세계를 두고 여태 집을 지키고 있었다니. 영미는 신이 나서 마음껏 몸을 흔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친구들이 내민 술을 마다 않고 받아 마신 탓일까. 빙글빙글 돌아가는 네온 불빛이 가물가물 흐릿해지면서 눈이 감겼고 곧 검은 장막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뿐,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함께 유쾌하게 술잔을 부딪쳤던 친구들은 다들 어디로 가고 잭나이프를 쥔 꽁지머리가 나타난 것일까. 꽁지머리는 영미를 방에 가두고 밤낮으로 괴롭혔다. 그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낄낄거릴 때를 제하고는 한시도 영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영미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할 때마다 잭나이프를 목에 들이대고는 욕정을 채웠다. 영미는 그 짓이 무서워 말을 줄였다. 그는 틈틈이 영미의 알몸 사진을 여러 자세로 찍어서 어디론가 전송을 했는데 거기에는 영미의 음부에 자신의 성기가 반쯤 삽입된 상태를 클로즈업한 것도 여러 장 있었다. 방은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이 없어서 불을 끄면 언제고 칠흑처럼 어두워지는 것으로 봐서, 지상에 있는 방은 아닌 것 같았다. 방에는 구석에 낡은 티비 하나와 철제 침대가 있을 뿐 변변한 가구 하나 없었다. 빛이 바랜 벽지에는 흩뿌려진 핏자국처럼 보이는 얼룩이 군데군데 많았다. 영미는 가끔 켜는 티비를 통해 닷새 쯤 지났다는 걸 짐작할 뿐 정확한 시간도 날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욕정을 채운 꽁지머리가 탕수육에 소주를 시켜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제 그만 나가야지?” 처음에 영미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다시 같은 말을 해서야 영미는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가 두 손을 모았다. “보내주세요. 집에 가고 싶어요. 보내주시면 모든 것 다 잊고 착하게 살게요. 제발요.” 영미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꽁지머리의 입 꼬리가 위로 씨익 올라갔다. 그가 영미의 턱을 어루만지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나야 보내주고 싶지. 우리가 그간 쌓은 정이 있잖아. 근데 인간의 심리란 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거든. 아마 너도 보내주기가 무섭게 경찰서로 달려갈 걸.” 영미가 바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러지 않아요. 절대로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영미는 다급해져서, 필요하다면 각서라도 쓰겠다고 말했다. 꽁지머리의 입 꼬리가 다시 씨익 위로 올라갔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야. 보기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그런 좋은 머리 두고 왜 공부를 하지 않았어.” 그는 마치 미리 준비한 것처럼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영미가 멈칫거리자 그가 종이와 펜을 다시 거두었다. 영미는 그것을 빼앗듯 낚아채며, 어떻게 쓰면 되죠? 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금은 자기도 뭐라고 써야할지 생각이 안 나니까 우선 종이 하단에다 주민번호와 주소, 그리고 이름을 쓴 다음 사인을 하라고 했다. 영미는 시키는 대로 재빨리 적었다. 사인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가 상관없다며 주머니에서 인주를 꺼냈다. 영미는 그의 생각이 바뀔지 몰라 얼른 엄지에 인주를 묻혀 이름 옆에 정성스럽게 지장을 찍었다. 꽁지머리는 영미의 어깨를 토닥거린 다음 종이와 펜을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영미가 이게 뭐에요? 하고 묻자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집에 갈 때 뭐라도 사들고 가야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까와는 다른 안도의 눈물이었다. 정말 집으로 보내줄 모양이구나 싶어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원망하지 마라. 네 운이 나빴던 거야.”
“안 할 게요. 진짜로요.”
“해도 상관없다. 난 엄연히 돈을 주고 너를 샀던 거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생각 안 나냐? 널 내게 넘긴 삼총사들 말이야.”
영미는 고개를 들어 꽁지머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걔들이 저를 팔았다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미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전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눈 장면부터 함께 어울린 시간들이 무성영화처럼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짓을 할 만한 애들이 아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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