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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1.17 01:5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49) - 바람의 기억
조회 수 1161 추천 수 0 댓글 0
5. 밤의 연가 “겉이 번지르르하니까 범털로 보였지? 걔들 순전히 개털이야. 그놈들이 미쳤다고 너 같은 촌닭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하겠냐?” 꽁지머리가 휴대폰을 꺼내며 타박했다. 영미는 셋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중 민호의 모습이 스쳐간 화면처럼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중에 합류했던 두 친구는 얼굴은커녕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민호는 정말 착했어요.” 꽁지머리의 입 꼬리가 씨익, 다시 올라갔다. “역전에서 너를 낚은 애 말이지? 노인들 무거운 보따리 들어다 버스에 올려주고, 정류장 주위에 버려진 종이컵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곤 했던 검정 양키스 모자 쓴 애.” “그걸 어떻게...?” 영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컵 중 하나는 내가 버렸거든. 걔가 착한 남자 연출 소품으로 쓸 수 있도록.” “그럼 그게 다 연출된 행동이었단 말이에요? 그럴 리가요?” “이래서 어린 조개들이 문제라는 거야. 넌 버스를 여러 대 그냥 보내면서 걔가 말을 붙여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애틋한 눈빛과 웃음을 슬쩍슬쩍 흘리면서 말이야.” 꽁지머리의 말에 영미는 고개를 떨궜다. 그랬다. 민호와 몇 차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마치 오래 전부터 마음을 둔 사이처럼 느껴져서 절로 가슴이 설렜던 것이다. 영미는 다시금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커다란 눈에서 쏟아지는 환한 웃음, 매끈한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친절한 말투, 톡톡 튀는 명랑한 행동들, 본인의 선행에 대해 누군가 칭찬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부끄러움 가득한 표정이 손에 잡힐 듯 눈앞을 어른거렸다. “민호가 정말로 저를 아저씨에게 넘겼어요? 진짜 믿어지지가 않아서요.” “아직도 콩깍지가 졸나 씌어있구먼. 정신 차려 이년아. 넌 이 바닥 에이스에게 걸렸던 거야.” “........” 영미는 민호가 자기를 얼마에 판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꽁지머리가 인상을 구기며 전화번호를 찍는 통에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꽁지머리는 전화기에 대고 출발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꽁지머리가 제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며 말했다. “좀 갑갑해도 참아라. 나는 너를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가는 동안 눈을 가리겠다. 차에 얌전히 있으면 다른 삼촌들이 집 근처에 안전하게 내려줄 거야.” 스카프가 다가오자 영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 말썽부리지 말고. 그리고 여기서의 일은 나가는 순간 바로 기억에서 지워라.” 영미는 네, 하고 대답했다. 곧 눈이 가려졌다. 앞이 더 캄캄해졌다. 영미는 우두커니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나갈 수 있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입 냄새가 훅 풍겨왔다. 이어 차가운 손이 복부를 헤집고 올라와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옷을 올려 유두를 빨았다. 영미는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견뎠다. 손은 곧 아래로 내려와 팬티 속을 헤집었다. 뱀처럼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순식간에 하의가 내려졌다. 영미는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었다. 차는 꽤 긴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곧 스카프를 풀어주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답답하니 풀어달라고 할 때마다 사내들은 이따 내려서 풀어주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마침내 차가 멈췄다. 함께 온 두 사내가 차에서 내리는 영미를 부축해주었다. 이제 눈 풀어도 되지요, 하고 영미가 막 말하려고 했을 때 앞에서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 길에 배달 오느라 수고들 했다, 놔두고 어서들 돌아가라!”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었다. 영미는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뭔가 무서운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순간 스카프를 걷어내고 무작정 뒤돌아서 뛰었다. 살려달라고 악을 쓰고 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발은 또 왜 그리 무거운지 마치 돌이나 쇠로 된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얼마 못가서 제풀에 나뒹굴었다. 단단한 손이 머리채를 잡았다. 그대로 질질 끌려서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은 좁고 어두웠다. 영미는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다 날아온 발길질에 옆구리를 맞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곧 들것에 실리는 자세로 양 팔과 다리를 잡혀서 방의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꽁지머리의 숙소처럼 이곳도 창문이 없었다. 몸이 절로 떨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영미는 이곳이 성매매업소라는 걸 다음 날 아침에야 밥을 가져온 아줌마로부터 들었다. “넌 나이도 어린 것이 뭔 빚이 그리 많누? 어제 삼촌들이 가져온 차용증을 언뜻 보니 이천이 넘는 것 같던데.” 영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나는 빚을 진 적이 없다고. 소란해지자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가 나타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영미는 기겁했다. 차용증이라고 써진 거기 하단에 자신이 꽁지머리에게 써준 주민번호와 주소, 그리고 인장이 선명했던 것이다. “좋은 안주에 술에, 맛난 전복죽까지 해줬는데 표정이 왜 그러냐? 꼭 독이 올라 고개를 바짝 쳐든 살모사 같구나.” 경철이 핀잔을 줘서야 영미는 화들짝 깨났다. 영미는 그날 역전에서 민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지금처럼 ‘밤의 꽃’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 같은 확신에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씨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지 뭐야. 내 나이 열하고도 아홉, 하필 그 꽃 같은 시절의 아프고 쓰린 기억이 말이야.” 영미가 술잔을 들었다. 경철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은 좋은 기억만 불러내라. 혼자 심각한 척 말고.” “맞아, 눈도 펑펑 내리는데 우리 술이나 맛나게 빨자, 씨발!” 자리에서 일어난 영미가 경철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둘은 술잔을 부딪쳤다. 경철이 전복죽 그릇을 영미 앞으로 내밀었다. “밥알이 들어가야 위가 편하지. 몇 숟갈이라도 떠라.” 영미는 도리질을 하며 오빠나 먹으라고 말했다. 경철이 테이블 가장자리로 그릇을 밀었다. “애써 쑨 건데 아까워서 어쩌지?” “집에 가져가지 뭐.” “그새 마누라 생각났구나.” “요즘 입덧 때문에 음식 투정이 장난 아니다.” “헐, 애 가졌어? 늘 피곤하고 시간 없다고 죽는소리 치더니, 언제 만든 거야? 하여간 솜씨도 좋아.” “씨가 실하고, 밭도 기름지니까.” 경철의 너스레에 영미가 앵돌아진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팔불출. 겸손할 줄 알아야지. 아, 그나저나 나도 입덧하고 싶다. 아 참, 근데 오빠 그거 알아? 애기 낳을 때 왜 여자만 배가 아픈지?” “여자만 아프지 남자도 아파야 하냐?” “그럼,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설계하시기를, 아내가 애를 낳으면 씨를 뿌린 남편도 같이 배가 아프게 하셨대.” “남자도?“ “그렇대도. 근데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긴 거야. 여자가 애를 낳는데 그 집 남자는 멀쩡한데 이웃집 남자가 배를 잡고 아파하는 일이 자꾸 터졌거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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