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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2.26 01:0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54)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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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밤의 연가 문이 열리자 룸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쏠렸다. 줄지어 입장이 시작되었다. 치맛자락 쓸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사내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아가씨들의 면면을 살폈다. 문지방을 넘기 직전 고개를 빼 안을 힐끗 살핀 영미가 고개를 틀어 소곤거렸다. “오늘 물이 별론데!” 정아는 못 들은 척 영미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놀이 모양새로 줄지어 들어간 아가씨들이 테이블을 향해 돌아섰다. 동백실은 앉은뱅이 테이블 다섯 개를 잇대서 꾸민 아담한 룸이었다. 테이블에는 기본 찬과 음료와 컵이 질서 있게 세팅되어 있고, 안쪽 간이 무대에서는 머리가 희끗한 두 명의 가야금 연주자가 나란히 앉아 음을 고르고 있었다. 4인용 테이블에 두 명씩 사선으로 마주 앉아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는 열 명의 사내들은 나이대가 지긋해 보였다. 거리낌 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짓궂은 장난도 유쾌하게 넘기는 것으로 보아 서로 친구거나 친분이 두터운 관계로 짐작되었다. “반갑습니다! 눈보라를 뚫고 저희 우림각에 오신 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내들의 시선이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장 마담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밤에 함박눈이 엄청 내려서 걱정했습니다. 행여 비행기가 결항되어 손님들 발을 잡으면 어쩌나 해서요. 마음을 졸이다 봬서 그런지 한 분 한 분이 다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사내들의 입 꼬리가 잔잔하게 올라갔다. 장 마담이 양 팔을 벌리면서 말을 이었다. “보세요, 저희가 정성껏 준비한 아가씨들입니다. 다들 미인이지요? 지금부터 눈을 크게 뜨시고 마음껏 골라보세요. 이제 눈빛 교환 시간을 드릴 텐데요, 마음에 들면 찜해두셨다가 이따 지명하시면 됩니다. 먼저 고르신 분이 임자에요. 만약 인기가 높은 아가씨가 있어 겹치는 일이 발생하면 간단한 게임으로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손님 중에 엉덩이 큰 아가씨를 선호하는 분이 계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제가 손님의 팬티 속 사이즈를 은밀하게 확인하고 거기에 꼭 맞는 아가씨를 골라드리겠습니다.” 사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장 마담이 뭔가 중요한 것을 빠트린 것 같은 몸짓으로 돌아섰다. “아, 중요한 거 한 가지를 빼먹었네요. 오늘 저희 우림각에 오실 수많은 손님 중 딱 한 분께 드릴 특별한 행운이 있거든요.” 장 마담이 정아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 이 예쁜 아가씨를 주목해주세요. 이 아가씨 머리에 있는 이게 무엇인지 아시는 분?” 시선이 모두 정아에게 몰렸다. “이건 족두리, 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걸 어느 때 쓰는가 하면요...” 그때 왼편 테이블 끝에 앉아 있던 이가 손을 번쩍 들고는 결혼식 때! 하고 외쳤다. 그는 할리우드 콧수염을 하고 있었는데 털이 풍성하지가 않아 마치 볼펜으로 그리다 만 것처럼 보였다. “어머나, 한국 연속극을 많이 보셨나봅니다. 정답이에요! 이것은 전통 혼례식이나 폐백 때 신부가 머리에 쓰는 것이에요. 아마 이쯤 말씀드리면 금방 눈치를 채셨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이 아가씨는 오늘 처음 출근해서 초야를 치르는 아타라시에요. 벌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싱싱하고 상큼해 보이지요?” 정아는 그제야 아까 장 마담이 따로 불러 머리에 급하게 족두리를 씌운 이유를 알았다. 아타라시라니! 은지를 낳은 전력은 덮어두더라도 엊그제 고바야시를 상대하고 간밤에는 강 회장을 접대한 전혀 ‘싱싱하지’ 않는 자신에게 ‘아타라시’라니... 얼굴이 데인 듯 화끈거렸다. 이건 얼마나 속보이는 기만적인 상술인가. 정아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떨궜다. “오늘밤 이 청순한 신부의 머리를 올려 줄 행운의 신사는 어디 계신가요? 참고로 아타라시는 봉사료에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선택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부담 없이 고르셔서 오늘 밤 최고의 추억을 만들기 바랍니다.” 가야금 연주가 시작되었다. 진양조의 느린 가락이 약간의 긴장감과 어수선함이 혼재한 실내 분위기를 조금씩 다잡아 누그러뜨렸다. 사내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첫 지명자가 나오자 뒤를 이어 하나 둘 손짓을 해댔다. 아직 정아를 선택한 이는 없었다. 사내들의 옆자리가 절반 쯤 채워졌을 때 가야금 가락은 중머리를 거쳐 굿거리로 바뀌었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테이블을 힐끗 살폈다. 선택된 아가씨들의 면면을 보니 그다지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다. 언젠가 영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본 남자들은 여자를 살 때 객관적인 미모는 별로 따지지 않아. 좀 못나보여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면 오케이지. 연주가 자진모리로 빨라졌다. 이제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직 짝을 지명하지 못한 두 사내도 정아에게 관심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봉사료에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장 마담의 고지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정아는 생각했다. 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아와 영미가 자리한 ‘앞니’ 쪽을 건성으로 지나쳐 양쪽 어금니 쪽 아가씨들에게 눈길을 두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까 족두리를 결혼식 때 쓴다고 대답한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은 정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장 마담을 향해 두 손의 검지를 굴리는 모양새로 흔들며 체인지! 하고 외쳤다. 장 마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하이! 하고는 서 있는 아가씨들에게 퇴장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지명을 받지 못한 아가씨들이 잰 걸음으로 룸을 빠져나갔다. “말도 안 돼. 쌈짓돈 털어서 온 사람들인가 봐. 족두리를 그냥 내보내다니!” 장 마담이 정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곤거렸다. “우째 이런 일이! 죄송해요, 우리 둘 다 바람을 맞을 줄 몰랐네요. 앞니 치욕의 날이에요.” 뒤에서 영미가 우는 소리를 냈다. 장 마담이 영미 어깨를 토닥여주며 어깨 펴라고 소리쳤다. 대기실로 돌아온 정아와 영미는 거울 앞으로 가 화장을 점검했다. 그사이 급하게 꾸린 열 명의 아가씨가 줄을 지어 동백실로 향했다. “족두리 때문에 낯이 뜨거워서 혼났어. 손님들도 보는 눈이 있는데, 이렇게 맛이 간 아타라시가 어디 있겠니?” 정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걱정 마, 아마 전화위복이 될 거야. 오늘은 매화실 물이 괜찮은 것 같아. 동백실 노땅들보다 젊고 쩐도 있어 보이고.” “거기서도 초이스 보장은 없잖아. 이거 벗어버리면 좋겠는데.” 정아가 거울 속 족두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대기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동백실로 간 두 번째 팀도 한 명만 지명되고 아홉 명이 돌아왔다. 할리우드 수염이 계속해서 퇴짜를 놓고 있다고 했다. “아니, 그 이방 수염은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거야? 별로 힘도 못 쓰게 생긴 게.” 영미가 장 마담의 등에다 대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냄새가 나.” 장 마담이 돌아보며 대꾸했다. “혹시 사냥꾼이라는 말씀이세요?” “안 그러면 저렇게 까다롭게 굴 이유가 없잖아. 뭐 내일 아침이면 정체를 알 수 있겠지.” “가서 수염을 확 뽑아버릴까요?” 영미의 농에 장 마담이 엄지를 세웠다. 급히 팀을 꾸린 장 마담이 다시 동백실로 출발했다. 정아가 영미에게 사냥꾼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콧수염 그치가 일본에서 여자 장사를 하는 것 같거든. 만약 그렇다면 아가씨를 빼 갈 목적으로 저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성매매업소를? 근데 그게 아가씨들 퇴짜와 무슨 관계가 있지?” “이런 바보, 좋은 물건을 고르려면 되도록 많은 상품을 보는 게 좋잖아. 같은 이치로 계속 퇴짜를 놓으면서 우리 우림각 아가씨들 면면을 보겠다는 의도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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