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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8.06 02:2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72)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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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응급피임약을 무색하게 만든 정자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루 먼저 사정한 경철일까, 아니면 다음날 들어온 아베일까. 둘 중 딱 찍어 누구라고 특정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응급피임약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걸 보면 먼저 들어온 경철의 정자가 조금 더 유리할 것 같다는 느낌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대성 추측일 뿐이었다.

하긴 누구의 아기인지 안다 해도 그다지 달라질 건 없었다. 경철의 아기이든 아베의 아기이든 그들의 동의를 받아 출산에 이를 가능성은 희박할 테니까.

불현듯 오래 전 장 마담이 했던 교육이 떠올랐다.

그날 화가 무척 난 장 마담이 무서운 얼굴로 일갈했다. “이년들, 콘돔 사용을 생활화하라고 내가 침이 마르도록 그렇게 강조했거늘, 왜 말을 안 듣고 이 지랄이니.” 장 마담이 그렇게 목청을 높인 까닭은, 그즈음 아가씨 4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헛구역질을 해대다 결국 소파수술을 받은 탓이었다. 가뜩이나 손님이 넘쳐 아가씨가 달리는 상황에 그런 일이 벌어지자 우림각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콘돔을 포기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임신의 위험도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건강과 손님의 안녕을 위해서 꼭 콘돔을 착용해야 해. 그건 우리에게는 일종의 방탄복이라는 걸 왜 몰라. 그리고 다들 알겠지만, 남자들 사정해봐야 별거 아니잖아. 양이라고 해봤자 통통한 생굴 두 개 정도 주서기에 갈아 놓은 정도지. 그렇지만 그 안에 약 3억에서 5억 마리의 정예 병사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걸 명심하란 말이다.”

장 마담의 성난 목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흔희 사정과 동시에 수억 마리의 정자가 모두 죽기 살기로 경쟁하며 난자만 보고 달리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다. 선두 그룹만 발에 땀나게 달릴 뿐, 후미 그룹은 그냥 노인들 장에 가듯이 걷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게으름을 피우지. 질이 좋은 코스 인지 질이 떨어지는 코스인지 구경하면서 말이야. 왜 마라톤 대회 열리면 흔하게 보는 현상 있잖아. 입상을 노리는 선수들만 선두에서 죽어라 달리고 나머지는 만고강산 유람하듯이 하는 거, 그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A라는 마라톤 대회와 B라는 마라톤 대회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경우가 있지. 물론 시차를 두고 말이야. 그럴 때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는 거야. A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후미그룹들이 B마라톤 대회 선수들이 뒤따라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화들짝 놀라 더 이상 뛰지 않고 돌아서서 스크럼을 짠다는 거다. 왜 그럴까? 그렇지, B마라톤 선수들의 추월을 막기 위해서지. 그렇지만 곧 총성이 울리고 사정이 되면 두 그룹이 마주치는 건 시간문제야. 그럼 어떻게 되겠니. 맞아, 엄청난 규모의 패싸움이 일어나는 거야. 상상해봐. 5억 명과 다른 5억 명이 벌이는 육박전을 말이야. 이 엄청난 정자들의 전투로 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아. 너희들 상상이 되니? 그 참상이? 근데 그 전투장이 어디겠어? 그래, 바로 너희들 질 속이란 말이다. 너희들 사정이 이리 절박한대도 콘돔 안 낄 거야?”

영미는 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장 마담이 임신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화를 낼지 불을 보듯 빤했다. 꼭 장 마담의 질책이 아니더라도 이 바닥에서 10년을 구르고도 그런 원칙 하나 지키지 못해서 화를 자초했다는 자괴감이 들자 영미는 몹시 우울해졌다.

영미는 아기가 자궁에서 자라는 동안 자신의 배가 바람을 먹은 풍선처럼 시시각각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배를 한껏 앞으로 내밀고 뒤뚱거리는 모습도 그려보았다. 순간 뇌리에 엄마의 모습이 스쳤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여름 어느 날, 엄마는 무명저고리에 겉치마만 두른 채 방바닥을 기며 뒹굴었다. 그 날은 유독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곧 뻥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엄마는 안방 문고리에 광목을 걸어 양손으로 잡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엄마의 사투는 한낮을 지나 오후까지 이어지다가 마침내 하늘에 별이 가득해서야 끝이 났는데, 영미는 엄마의 다리 사이에서 아기 머리가 쑤욱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그대로 오줌을 재릴 뻔했다.

산간도로를 막 벗어나 반듯한 관광도로로 들어섰을 때, 조수석에서 불쑥 조용필의 음성이 터졌다. 영미는 휴대폰을 들어 창을 확인했다. 이 지역 일반전화였지만 숫자가 생소했다. 이런 건 안 받는 게 신상에 이롭지, 암. 영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전화기를 옆 좌석에 내려놓았다. 조용하던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영미는 곡에 맞춰 몇 소절 흥얼거렸다.

영미의 전화벨을 들은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핀잔을 주곤 했다. 요즘 이런 구닥다리 벨소리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그때마다 영미는 이 노래야 말로 부르다가 내가 죽을 노래라고 강변했다. 곡이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덕분에 노랫말까지 정확하게 흥얼거릴 줄 아는 손님이 적지 않아서 실제 접대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노래를 매개로 손님과 친밀해지고 그 친밀함이 나중에 수입과 연결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기에 주변의 시선쯤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노래가 서너 차례 반복 되자 영미는 다시 한 번 번호를 확인했다. 이렇게 끈질기게 시도하는 걸 보면 뭔가 절실한 이유가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저하다 휴대폰을 열었다.

저편의 첫마디에 영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사카 사투리로 무장한 가늘고 높은 톤의 정체를 영미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런 씨, 영미는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다나카였다. 그는 다찌계에 소문이 자자한 ‘날파리’였다. 날파리는 이 바닥 은어로 귀찮은 손님이라는 뜻이다.

그는 우림각에 딱 두 차례 다녀간 그저 그런 손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만만한 손님이 아니었다. 단 두 번의 기회를 통해 그는 지금 이십여 명이 넘는 아가씨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건 바로 특유의 달변과 적극성 덕분이었다. 붙임성 좋고 친절한 화술에 아가씨들은 쉬 경계를 풀었고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해 연락처를 확보했던 것이다.

영미는 부러 친절한 어투로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영미가 보고 싶어서 하던 일 팽개치고서 비행기에 올랐다고 엉너리를 쳤다.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감동이에요!” 영미는 욕지기가 목젖까지 솟았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응했다. 영미의 반응에 고무된 그가 지금 당장 만나자고 명령조로 말했다. 영미는 한 박자 쉬었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이, 어쩌죠?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지금 병원이거든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그가 재빨리 그럼 이따 끝나고 영미 집에서 보면 되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영미는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쯤에서 확실히 자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안 된다니까요.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아서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하거든요. 당분간 꼼짝을 못할 것 같아요!”

다나카는 혼자 징징거리다 다시 연락을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영미는 좀 더 단호하게 자르지 못한 걸 후회했다. 혹시 밤에 정말 집으로 찾아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가 우림각으로 가지 않고 아는 아가씨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는 것은 빤한 속내가 있어서였다. 우림각을 거치면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드니까 아예 직거래를 하려는 것. 하지만 말이 직거래지 따지고 보면 저만 이익을 얻겠다는 수작이었다. 영미를 포함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가씨들 모두 낭패를 봤다. 우림각을 통하면 얻게 되는 각종 커미션을 포기하고, 자기 숙소를 내주고 극진하게 접대한 결과가 너무나 참담했던 것이다.

그는 대접에 걸맞은 팁을 보장해주기는커녕 기본적인 화대도 챙겨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누구도 티가 나게 반발하지 않았다. 다나카의 현란한 화술에 넘어가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도 하나 같이 멱살잡이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건 아마도 다나카가 입버릇처럼 주절대는 ‘현지처’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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