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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9.17 02:25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0)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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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이 바닥이야 늘 요지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도덕은 있어야지. 가로채서 그만큼 누리면 됐지 저게 뭐냔 말이야. 저건 마치 호텔 뷔페에서 배 두드려가며 우아하게 먹고 와서 무료급식소 얼쩡거리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경우 없는 짓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렇다쳐도 후쿠다가 알면 얼마나 어이없겠니? 뭐 주고 뺨 맞는 격이지.”

“그냥 목욕하러 왔을 수도 있잖아.”

“잰 출근할 때만 여기로 와. 다른 때는 골프연습장에서 운동하고 근처 불가마에서 종일 논다고.”

“골프도 쳐?”

“저거 안 보이니?”

정아는 고개를 돌려 거울 앞에서 스윙 연습을 하는 금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체구는 작달막했으나 오밀조밀 균형감 있는 몸매였다.

“내가 이렇게 입방아를 찢긴 해도 사실 투자한 만큼 거둔다는 말을 증명한 케이스기는 하지. 저년이 분수에 맞지 않게 골프를 치러 다닐 때 주위에서는 다들 손가락질을 했거든. 밑구멍 팔아서 입에 풀칠하는 주제에 골프장 출입이 웬 말이냐고. 근데 나름 선경지명이 있었던 거지. 골프 실력을 연마하면서 후쿠다 같은 손님이 나타나길 기다렸던 거야. 순영이가 쟤보다 훨씬 예쁘고 성격도 좋지만, 결국 골프를 통해서 후쿠다의 마음을 빼앗아 실속을 차린 거잖아. 그러니까 너도 저년처럼 호사 누리고 싶으면 골프 배워 둬.”

“어느 세월에 배우겠니. 근데 손님 중에 골프를 치는 사람이 제법 많은 모양이지?”

“점점 느는 추세야. 머지않아 개나 소나 다 치게 될 거다. 나도 주워들은 풍월이 있어서 요즘에는 손님이 오면 손부터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지. 두 손이 다 햇볕에 타서 구릿빛이면 노동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확률적으로. 근데 한 손만 유독 그을린 경우라면 골프를 치느라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여자들은 골프 칠 때 양손 다 장갑을 끼지만 남자들은 한 쪽만 끼니까. 오른손잡이는 왼쪽 손에만 착용하는 식이야. 골프를 친다는 건 아무래도 이게 좀 있다는 증거니까 팁이나 커미션에 영향이 있게 마련 있거든.”

영미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아도 손가락으로 따라하며 빙그레 웃었다.

“너도 초이스 시간에 손님 손을 슬쩍 훑어보고 저 사람이다 싶으면 노골적으로 시선을 던져.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하는 추파를 담아서. 아참, 골프 손님이 좋은 점 한 가지 더.”

그때 옆에서 씻고 있던 아가씨가 영미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이야기가 끊겼다. 언니들은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아서 씻지도 않고 그리 재미나게 이야기만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던 것이다. 영미가 웃으며 우리 둘이 사귀잖아 하고 큰소리로 대꾸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대개 다음날 골프 계획이 있는 손님들은 아가씨들을 아침까지 잡아두지 않아. 늦어도 자정 무렵이면 보내주게 되어있어. 필드에 나가야하니까. 섹스라는 게 허리와 다리 힘으로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침대에서 무리하게 힘을 쓰면 필드에서 다리가 후들거릴 수밖에 없지. 내기 골프라도 치는 날에는 특히.”

영미가 다리를 떠는 흉내를 내며 실감나게 말했다.

“일리가 있긴 하다만.... 그렇게 잘 아는 너는 왜 안 배우니?”

“나도 연습장에 등록해서 정식으로 배운 적이 있지. 근데 맨날 술 마시고 새벽까지 시달리다 보니 피곤해서 그만 둔 거야.”

“그게 뭐야, 돈 아깝게.”

“하긴... 근데 나 채도 있다. 아마 지금쯤은 연습장 창고 어딘가에 박혀있겠지만. 아주 골동품에 가까운 채인데... 아씨, 그거 선물해준 할아버지 생각난다.”

“와, 그런 손님이 다 있었어?”

“얘 봐, 나도 한 때는 인기몰이를 했다니까.”

영미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정아가 어떤 분인지 얘기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메 상이라고 참 인자한 분이었지. 안타깝게도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그 어른을 세 번 정도 모셨는데, 네 번째 오셨을 때 뜬금없이 골프 가방을 가져오셨더라고. 가방이 좀 헐었지만 채는 관리를 잘한 흔적이 영력했지. 그건 부인이 쓰시던 채였어.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버리려고 했던 걸 가져온 거야. 얼마나 오래된 채인지, 드라이브와 우드 하나가 나무로 되어 있더라. 헤드가. 공을 때리는 부분이 말이야. 그거 연습장에 가지고 갔더니 이런 골동품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다들 신기해했어. 그러고 보니 내가 연습장을 기피한건 채가 창피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 참 못 됐지?”

영미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정아는 영미에게 골프채를 줬다는 할아버지를 그려보았다. 그와 짝을 이뤄 공을 쳤다는 할머니의 모습도 상상했다. 하지만 기모노를 입고 종종 걸음을 치는 할머니와 골프는 어쩐지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너를 참 예쁘게 보셨나보다. 건강만 좋았다면 너랑 같이 운동을 하셨을 것 같아”

“물론이지. 연습장에 가라고 봉투도 주셨거든. 연습 열심히 해서 다음에 함께 필드에 나가자고. 근데 그게 마지막이었어. 소식이 없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며느리라는 여자가 받아서 그 어른은 지금 치매 전문병원에 계시다고 알려 주었지.”

“국제전화까지 건 걸 보면 너도 꽤나 마음을 준 모양이구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좋은 어른이었거든. 만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 모시고 여기저기를 다녔지. 누가 보면 꼭 산책 나온 부녀 같았을 거야. 수목원도 가고 어시장 구경도 했고, 택시를 불러서 관광지도 돌고 했으니까. 쇼핑이나 단란주점을 안 가는 대신 팁을 넉넉하게 쥐어주셨지. 어느 날은 잠자리에서 너무 힘이 없으시기에 야매로 구한 비아그라를 드렸는데 그게 바짝 서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시더라고.”

“그러고 보면 우리 영미가 참 착한 구석이 있어.”

영미가 정아의 엉덩이를 손으로 갈기며 깔깔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나? 이래봬도 착하다고 상까지 받은 몸이잖아.”

정아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영미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 안 했나? 재작년 어버이날에 요양원에서 효녀상을 받았다니까. 시상식 때 아버지가 춤을 추는 바람에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지만.”

“오, 듣던 중 제일 멋진 말이야. 그런 자리에는 나도 좀 데려가지.”

이번에는 정아가 영미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출입구 쪽이 소란해졌다. 낯이 익은 아가씨 세 명이 들어와 부산을 떨었다. 영미가 턱짓으로 그네들을 가리켰다.

“저년들 눈치 없는 것 봐라. 아주 사우나를 전세 냈잖아. 저것들이 저리 봬도 아주 부잣집 자제분들이셔. 왕년 부자가 아니라 지금도 부자인데 꼴좋게 저러고들 있지. 호강에 넘쳐서 지랄하는 애들. 부모들 감쪽같이 속이고 말이야. 저기 정면으로 보이는 생머리 있지? 저년은 울산에서 왔는데 아버지가 이름만 대면 다들 아는 회사의 임원이래. 재작년에 상무였으니 이제는 전무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등지고 앉은 노랑저고리는 여기 앤데 집이 과수원을 크게 한다나봐. 거기 갔다 온 애들 말로는 과수원에 잘 못 들어가면 길을 잃는대나 어쩐대나. 너무 넓어서. 나머지 하나는 서울서 왔는데 사투리가 섞인 걸 보면 토박이는 아닌 것 같아. 잰 관광 왔다가 그냥 눌러 앉은 케이스지. 셋 다 공통점이 뭐냐면, 이런 일 안 해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도 자청해서 한다는 거야. 집에서는 다들 여행사 전문 가이드로 알고 있대. 아니, 밑까지 대주는 가이드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니? 박봉에도 성실하게 일하는 진짜 가이드들이 들으면 땅을 칠 노릇이지. 서울에서 왔다는 저년은 아주 구체적으로 웃겨. 지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뻥을 쳤대나 어쩐대나. 그러니까 재들하고 우리는 근본적으로 입장이 다른 거지. 말하자면 우리는 생계형이고 재들은 취미로 즐기는 거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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