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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11.19 00:28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8)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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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그 치과의사 얼마나 당황했을까? 아가씨 입에 이빨이 하나도 없었으니! 순간 틀니가 필요한 환자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영미의 너스레에 정아가 다시 끽끽거렸다. 
"아유, 상상도 참. 어, 그러고 보니 너도 이빨은 없는 것 같은데?"
정아의 농에 영미가 바로 반격했다. 
"가시나, 없긴 왜 없어, 지금껏 이 입에 물려서 죽어나간 남자들이 얼만데."
"어휴, 알았어. 항복!"
정아가 계단 쪽을 힐끗 살피며 두 손을 들었다.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이모의 다리가 보였다.
"우리 흉보겠다. 소갈머리 없다고."  
"하긴 지금 내가 웃고 떠들 처지가 아닌데 말이야."
정아의 소곤거림에 영미가 표정과 자세를 고치며 대꾸했다. 
계단을 내려오던 이모가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더니 다시 위로 올라갔다. 영미가 턱짓으로 뒷모습을 가리켰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가봐. 혹시 단속이 떴나?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가 온 건 아무도 모르잖아. 그리고 신고가 들어갔다면 이미 확인이 들어왔을 거고. 아마 제발이 저려서 그러실 거야. 저 양반이 저리 조심하는 이유가 있거든. 지금 집행유예 기간이라서 다시 걸리면 가중처벌을 받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저 이모도 우리처럼 살얼음판을 맨발로 걷고 있는 거야."
영미가 혀를 찼다.  
"그냥 병원에서 대우받으며 편하게 근무를 하지 왜 그만 두고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신다니?"
"얘 좀 봐. 그러는 넌 왜 그 좋은 직장 걷어차고 다찌가 되셨남?"
아차, 싶었는지 영미가 얼른 변명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는 거야."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눈치를 살피던 영미가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넌 어땠어?"
뭐가, 하는 표정으로 정아가 영미를 바라보았다. 
"네 몸에 은지가 들어왔을 때 어떤 느낌이었냐고."
"아, 그때. 아주 묘했지. 감정의 변화가 몹시 복잡했어. 슬펐다가, 두려웠다가, 고마웠다가... 은지는 내게 특별한 아기였잖아.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일종의 유품이었으니까."
정아가 고개를 들어 천정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영미가 말을 이었다. 
"참 안 됐어, 딱해. 은지아빠 말이야. 자기 씨가 발아된 줄도 모르고 떠난 거잖아." 
"딱하긴 뭐가 딱해. 그렇게 갈 거면 애초에 씨를 뿌리지 말아야지."
"뭔 소리야, 은지아빠가 어디 죽고 싶어서 죽었니?"
"몰라, 어쨌든 난 화가 나."
"어쨌든 넌 대단한 결정을 했어. 미혼모를 자청했으니..."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겨를이 없었을 뿐이야. 그땐 그의 주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차마 죽음을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미처 다른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어. 그러다 정신이 퍼뜩 들었지. 내가 지금 아기를 가진 거야? 하고. 처음에는 몇 번이나 지우려고 했어. 병원 앞에서 한나절을 서성거린 적도 있지. 근데 막상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하면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딱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 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지금 내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 생명체를 무참하게 내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입을 하, 벌리고 정아의 입을 쳐다보고 있던 영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지금 나도 그런 비슷한 느낌 때문에 마음이 편치가 않거든." 
"지금 네 상황은 나와 다르잖아. 마음이야 아프지만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어쩔 수가 없지."
영미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정아의 말을 받았다. 
"넌 진짜 은지를 지우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나도 이게 경철 오빠 아기였으면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을 거야."
"설사 오빠의 아기라고 해도 심사숙고해야지.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건 정말 지옥 그 자체니까."
"그래도 넌 잘 해내고 있잖아."
정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게 잘 키우는 거니? 어미라는 여자가 아이 혼자 집에 두고 밤이면 부나비처럼 불빛을 따라 밖으로 나돌고 있는데... 지금도 딱하지만 애가 자라서 엄마가 몸 팔아서 저를 키운 걸 알면 어떻게 되겠니. 아마 우리 은지 미칠지도 몰라."
"그러니 은지가 자라기 전에 이 생활 얼른 끝내야지. 어이구, 돈이 웬수지. 어디서 돈벼락 같은 거 안 떨어지나?"
"난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그저 빚 청산하고 은지 수술만 끝내면 미련 없이 뜰 거야."
이모가 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애기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가져온 보자기와 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이모가 구시렁거렸다. 
"아까부터 저 아래 골목에서 얼쩡거리는 놈이 있어서 말이야." 
보자기를 펼치자 군용 모포와 널브러진 화투가 나왔다.
"수상해 보였어요?"
"우리 집을 살피는 눈치였거든."
이모는 방석을 가져와 자리를 만든 다음 중앙에 모포를 펼쳤다. 그러고는 화투를 섞어 패를 돌렸다. 혹시 단속이라도 나오면 우린 지금 저녁내기 화투를 치고 있는 거야. 영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세웠다. 
이모는 탁자 위에 천을 깔고 거기에다 백에서 꺼낸 기구들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많이 아파요?"
시트에 몸을 뉘며 영미가 물었다. 
"이게 들어갈 때 약간의 이물감이 느껴질 거야. 그리고 통증이 몇 차례 있을 거고. 다들 잘 이겨내니까 너무 겁먹지 마라. 금방 끝나."
원통 모양의 보조기구를 흔들며 이모가 말했다. 정아가 한 걸음 다가가 영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모는 바퀴가 달린 의자를 끌어와 다리 사이에 놓고 걸터앉았다. 곧 영미의 다리가 벌어졌다.  
수술은 예상보다 빨리, 순조롭게 끝났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몇 차례 지나고 보조기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자 영미는 살며시 눈을 떴다. 둔부를 살피던 이모와 눈이 마주쳤다. 좀 어때? 이모가 물었다. 괜찮아요. 영미가 대꾸했다. 다 끝났어. 이제 쉬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까지는 일 나가면 절대 안 돼. 이모의 다짐에 영미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영미는 이모를 따라 옆방으로 갔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거라. 이모가 이부자리를 펴주며 말했다. 영미가 자리를 잡자 정아도 옆에서 나란히 누웠다. 딸깍 소리와 함께 방안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몸이 나른해졌다. 영미는 눈을 뜬 채로 천정을 응시했다. 어둠에 닫혀있던 시야가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영미는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움츠렸다. 두 손바닥을 기도하는 모양새로 붙여 사타구니 사이에 넣었다. 그러고는 마음으로 아가야, 미안해, 하고 말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의 예리한‘칼춤’에 태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울음을 터트릴 시간도 없었을 테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던 통증, 그게 혹시 아기가 엄마에게 보낸 마지막 인사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코끝이 아려왔다. 영미는 다시 한 번 "아가야, 정말 미안해!"하고 중얼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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