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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11.25 23:12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9)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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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비의 계절

비스듬한 하오의 햇살이 정면에서 날아왔다. 버스에서 내린 정아는 보도로 나섰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부신 눈을 견디다 지그시 감았다. 따스한 햇살이 얼굴로 스며들었다가 이내 전신으로 번져나가는 느낌이 흐뭇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마침내 길고 긴 삭풍의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로 시선이 갔다. 나무들은 저마다 가지 가득 꽃망울을 매달고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머지않아 꽃망울이 터져 하늘 가득 꽃비가 흩날릴 것이다. 아침 뉴스의 날씨예보에서도 그랬다. 기온이 예년과 달리 너무 갑작스럽게 올라가 봄꽃들의 개화가 당겨질 것 같다고. 그래서 올해 벚꽃잔치는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이다.  
벚나무 거리를 지나자 오른편으로 눈에 익은 기와지붕이 보였다. 정아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왔을 뿐인데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담장 아래 보도는 한산했고, 우림각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정아는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 출입문을 열고 복도로 올라섰다. 정아는 장 마담의 룸 앞에 서서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앉은뱅이책상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장 마담이 고개를 들었다. 찾아뵙겠다고 미리 전화를 해서인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벗은 안경을 든 손으로 건너편 자리를 권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방석에 앉은 정아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휴가가 좀 필요해서요." 
장 마담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거든요."
정아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이가 들면 다 아프게 되어 있지. 그래 어디가 안 좋으신데?"
"다리가 부러지셨어요. 밭에 나가셨다가 그만."
장 마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니 노인네가 집에 계시지 뭐 하러 밭에는 가셨다니."
"다행히 동네분이 구급차 불러주셔서...."정아는 부러 울상을 지었다. 
"큰일 날 뻔 했구나." 
장 마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아는 조바심이 들어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장 마담이 혹시라도 어느 병원에 계신지 확인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부탁드려요. 도와주실 분이 아무도 없어요. 필요한 조치만 취하고 바로 돌아올게요."  
"집이 강원도라고 했지?"
"네, 정선 산골이에요."
장 마담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뭐 다 좋아. 우리 우림각은 휴가신청을 하면 기본적으로 다 보내준다. 각자가 다 개인 사업자이니까 스스로 쉬겠다면 막지 않아. 그런데 넌 좀 특별한 입장이어서 말이지."
정아는 장 마담이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고향집에 다녀와야겠다고 영미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영미가 그랬다. 선불금 때문에 장 마담이 허락할지 모르겠다고. 
"제가 잠수를 탈까봐 그러시는 거지요?"
정아는 영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정아도 많이 컸구나. 잠수를 다 알고. 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사람 마음이란 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잖아. 우림각 초창기에 그런 일들이 여러 건 있었어. 아버지 임종 지키러 가야한다고 울고불고 해서 보내주니 함흥차사고, 엄마 칠순 잔치에 간다고 한 애는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10년 전에 돌아가셨더라. 믿고 보내주면 양심이 좀 있어야 하는데 그걸로 줄행랑이야. 그러면 돈 떼이고 사람까지 잃게 되지. 시쳇말로 뭐 주고 뺨맞는 꼴이야. 물론 우리 정아 품성으로 보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내 입장이 참 어렵다. 더구나 넌 회장님이 직접 챙긴 경우라서 말이야."
"그럼 제가 회장님 찾아뵙고 말씀을 드릴까요?"
"얘 좀 봐. 누구 익사하는 꼴 보려고 그러니? 그런 걸로 회장님을 피곤하게 하면 안 되지. 내 얼굴이 뭐가 되겠니."
장 마담의 강경한 반응에 정아는 당황했다.  
"이따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방법을 모색해 볼 테니까. 나가서 일할 준비해."
장 마담이 손수 차를 내려서 종이컵에 담아주었다.  
대기실은 여전히 한산했다. 옷을 갈아입고 창가로 갔다. 정원의 잔디는 아직도 누런 겨울옷 그대였다. 검정색 고양이 한 마리가 정원을 가로질러 담장 아래 연못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잔디를 쪼고 있던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라 종려나무 꼭대기로 자리를 옮겼다. 정아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실내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밖에서 열을 지어 들어온 것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미경이가 아는 체를 했고 이어 입구에서 영미가 손을 흔들었다. 정아는 다시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양이가 연못 가장자리에서 몸을 낮추고 물고기를 노리고 있었다. 정아는 고양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담 언니랑 얘기 잘 되었어?"
정아가 돌아섰다. 옷고름을 매조지며 영미가 다가왔다. 
"아니, 좀 난감해 하시더라."
"내가 그랬잖아. 입장이 난처할 거라고."
영미가 정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정 안 되면 내가 인질로 나서지 뭐."
"인질? 그게 뭔데?"정아가 영미를 쳐다보았다. 
"네가 잠수를 타면 내가 책임을 진다는 보증 말이야. 선불금 땡기는 사람이 별로 없는 우림각에서는 생소하지만 일반 유흥업소에서는 흔한 방법이지. 도망치지 못하게 서로 감시하라는 의도로 서로 보증을 서게 하거든."
"진짜 살벌하구나." 
"그건 약과야. 그나저나 은지와 얘기는 된 거야?"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정아가 거짓말을 해가며 고향집에 다녀오려는 것은 순전히 은지 때문이었다. 일단 은지를 엄마에게 맡겨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은지를 집에 혼자 두고 일하는 게 한계에 다다랐음을 실감하는 요즘이었다. 더구나 세 번이나 잠자리를 하고도 협박을 멈추지 않는 미친개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미친개도 뭔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아직 정확하게는 못했어. 시골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정도로 운만 띄운 상태야."
"아무튼 내 생각에는 은지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이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아. 마담언니가 그러는데 우리가 지금처럼 일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대. 작년에 성매매업소 화재가 거푸 터진 이후로 국회의원들 움직임이 심상지가 않다고 해. 만약 성매매특별법이 만들어지면 우리 같은 대형업소가 제일 먼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고."
정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이야. 강 회장이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잖아. 근데 이미 틀린 것 같아. 언제 당선이 되어서 그걸 막을 수가 있겠어. 떠난 버스에 대고 손 드는 격이지."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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