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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9.08.07 05:05

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120회)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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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제120회)

바람의 기억

9. 새장을 열다

“정말이네, 누가 먹이를 줬을까? 난 진작 고양이가 냠냠했을 줄 알았는데.”
작은 바위 하나씩 차지하고 쪼그려 앉아 연못 속의 움직임을 살폈다. 어림으로도 다섯 마리는 넘어보였다. 백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문 영미가 한 모금 길게 빨아 허공에 날렸다. 
“우리 뒤에 가보자. 거기 새장에 귀여운 애 둘 있잖아.”
정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영미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설마 지금까지 살아있을라고? 먹이 줄 사람도 없는데.”
“물고기도 이렇게 살아 있잖아. 따라와!” 
둘은 건물 뒤편으로 갔다. 모서리를 꺾어 돌자 앞이 캄캄해졌다. 늘 켜져 있던 가로등과 담장 너머 별채의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 나아갔다. 
“회장님도 이사를 한 모양이네” 
정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별채에서 벌인 강 회장과의 정사가 생각났다. 정아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둠에 적응될 무렵 중간 기둥에 매달린 상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팔을 뻗어 더듬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때 뭔가가 손끝에서 파닥거렸다. 정아가 비명을 지르며 한걸음 물러섰다.
“우와, 얘들도 살아있어!”
정아의 탄성에 뒤에 있던 영미가 앞으로 나섰다.
“이것들 불사조네! 문이 열려 있잖아, 근데 왜 날아가지 않은 거지? 이런 멍청이들! 이젠 니들에게 먹이를 줄 사람도 없다고. 그러니까 어서 날아가 어서!”
영미가 새장을 거칠게 흔들며 두드렸다. 한 마리가 먼저 근처 소나무로 날았고 이어 한 마리도 뒤를 따랐다. 
“쟤들 지금껏 새장 속에서만 살았는데 밖에서 살 수 있을까?”
“놔 둬, 다 지들 운명이지. 지금 우리 코가 석잔데 저것들 걱정하게 생겼나.” 
정아의 걱정에 영미가 바로 핀잔을 끼얹었다. 
둘은 뒤란을 돌아 나와 다시 연못으로 왔다. 
“얘들은 저 새들처럼 어디 도망갈 곳도 없구나. 그러고 보니 이 물고기들 신세가 우리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치?”
영미의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참에 너도 시집이나 가라. 더 늦어지면 후처 자리도 안 나.”
정아의 말에 영미가 발끈했다. 
“지랄, 누가 데려가야 말이지. 그리고 혹시 갔다가 아까 그놈처럼 쪽바리 냄새난다고 패고 구박하면 어떡하니.” 
정아의 뇌리에 인수의 얼굴이 스쳐갔다.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그도 쪽바리 냄새가 난다고 구박을 할는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당장 나타나 머리채를 잡고 난리를 쳤으면. 아니, 오지 않아도 좋다. 그냥 세상 어딘가에서 숨을 쉬며 살아있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그만 가자. 시간 됐어.”
영미가 재촉했다. 정아는 쪽문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둘은 담장을 따라 차로 갔다. 시동을 켠 영미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라도 냉정하게 생각해봐. 내키지 않으면 당장 취소하면 되니까.”
“야, 겁 그만 줘, 죽으러 가는 거 아니잖아. 야마다도 이젠 나이가 들었을 테니까 예전 같지는 않겠지.”
영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야. 그 놈은 연애를 하러 오는 게 아니라 고문을 하러 오는 거라니까. 그걸 명심해. 그리고 절대로 빨리 끝내려고 오버하지 마. 어차피 동트기 전에는 놔주지 않으니까 느긋하게 받아들여. 그렇다고 시체처럼 굴면 안 돼. 끝나면 그럴 거야. 자길 재워주고 가면 좋겠다고. 그럼 흔쾌히 그런다고 해. 놈은 네 가랑이에서 자겠다고 할 거야. 그럼 다리를 벌려줘. 걱정하지 마 곧 코를 골 테니까.”
호텔의 거대한 몸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정아는 그제야 조금씩 몸이 떨렸다.   
“물건은 어때? 대물이야?”
“말해 뭐해. 아주 커. 물론 자연산은 아니고. 인테리어가 아주 화려하지. 확대 수술을 받은 데다 온갖 구술로 치장을 했어. 언뜻 보면 썩은 고구마 같아.”
영미가 감자주먹을 크고 길게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막 들어섰을 때 휴대폰이 울었다. 정아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귀에 댔다. 은지의 새된 목소리가 영미에게까지 들려왔다. 
“엄마, 할머니가 정말 많이 아파. 눈도 못 뜨고 눈물만 흘려!”
울음 섞인 아이의 목소리가 정아의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엄마가 내일 꼭 갈 거야. 오늘은 비행기가 끝나서 못 가니까 네가 잘 보살펴드려. 듣고 있니? 정말 내일 간다니까. 전화 바꿔 봐, 할머니 바꿔 줘.”
수화기에서 은지가 할머니에게 전화기를 건네려고 애쓰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곁에서 영미가 기남에게 연락해서 병원으로 모시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정아는 기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좀체 연결이 되지 않았다. 
차가 멈췄다. 아까 장 마담이 사라졌던 승강기가 저만치 보였다.  
“시간 없다. 알지, 8층에서 내려서 비상계단 타는 거. 조심해.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영미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끝나면 늦어도 전화해. 데리러 올게. 아파도 눈물 보이지 마. 알았지? 다 잘 될 거야. 룸 알고 있지?”
영미가 몸을 돌려 정아를 안아주었다. 정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차에서 내려 승강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버튼을 누르고 돌아섰다. 영미가 차창 밖으로 팔을 뻗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마침내 승강기 문이 닫혔다. 영미의 차가 통째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아는 승강기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지친 다찌 하나가 이편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그만 돌아와. 이젠 은지랑 어미랑 같이 살아야지! 
“그럴 거예요,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거울 속의 다찌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울먹였다.   
8층. 승강기 문이 열렸다. 정아는 승강기와 복도에 한 발씩을 걸치고 고개를 내밀었다. 진홍색 카펫이 깔린 복도는 고요했다. 끝에 있는 비상구로 나가 계단을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9층과 10층 사이의 마지막 계단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유리창으로 시내의 북쪽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온통 촛불로 치장한 듯 화려했다. 눈을 감았다. 고향집이 흑백으로 떠올랐다.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정아는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1018호 앞에 섰다.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 입술을 깨물어 본다. 별로 감각이 없다.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때였다. 백 속에서 다시 휴대폰이 울었다. 정아는 아차 했다. 미리 전원을 꺼야 한다는 걸 깜빡했다. 복도를 살피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끄려고 보니, 은지였다. 엉겁결에 전화를 받았다. 순간, 은지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현기증이 났다. 너무 어지러워 무릎이 꺾였다. 휴대폰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정아는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무섬증이 밀려들었다. 금방이라도 1018호 문이 떨어져 내려 몸뚱이를 덮칠 것만 같았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엄마가 숨을 쉬지 않다니! 
정아는 비상구를 향해 기었다. 꺾인 무릎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진홍색 카펫에 툭툭 핏물이 돋기 시작했다.*  
(1부 끝) 

* 장편소설 『바람의 기억』을 여기서 닫습니다. 독자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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