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는 프랑스에서 한번도 회고전을 갖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햇빛이 많은 풍경, 사막같은 건축물들, 고독한 군상들 등 중요한 그의 작품들이 그랑 빨래(Grand Palais)에서 선을 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아메리카 신화를 중심으로 심리적, 사실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누구나 ‘언덕위의 등대’, ‘주유소’ 또는 ‘밤 새들’과 같은 호퍼의 작품들이 포스터나 우편엽서로 만들어진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카고, 뉴욕 또는 달라스에 있는 호퍼의 미술관을 직접 방문해서 그의 오리지날 그림들을 감상해 본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중에게 사랑 받고 있는 에드워드 호퍼는 유럽에서 전시한 적이 별로 없을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한번도 회고전을 열지 않았다. 바로 그점이 에드워드 호퍼의 아이러니이다. 물론 다른 아이러니도 많지만 말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 식 삶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호텔방, 연극 공연장 그리고 고독한 인간 군상들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사실 에드워드 호퍼는 쿠르베(Courbet) , 와토(watteau), 마르께(Marquet), 드가(Degas)를 찬미하면서 프랑스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현실의 세세한 면들을 1차적 시각으로 그린 그의 그림들은 실제보다 더 복잡하고 정신적이다.
그랑 빨래에서 열리는 호퍼의 전시회는 호퍼의 작품들을 그의 수학시절부터 시작해서 수채화시절을 거쳐 미국에서의 절정기까지 연대적으로 되짚어 보면서 그의 작품들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그저 멜랑꼴리의 작가로 축소해서 해석하고 있던 그의 작품들을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를 연구하는 것은 또한 미국의 현대미술 초기를 연구하는 것이다.
퐁피두 센타의 부관장 디디에 오틴제( Didier Ottinger)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 « 나는 전통적으로 아방가르드 형식으로 각광받은 예술인들과 함께 1913년 아모리 쇼( l’a mory show= 미국 현대 예술의 국제 전시회)로 시작된 예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했다. 1908년 뉴욕의 맥베드 갤러리( la galerie Macbeth)에서 열린 8인 그룹(Groupe des Huit)의 전시회는 사실주의와 삽화를 통해 미국 현대 예술을 확고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
미국에서 사실주의란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유럽에서 사실주의는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전시회의 목적은 미국 사실주의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 첫번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쓰레기 통 학교에서 (A l’école de la poubelle)
에드워드 호퍼는 어떤 미술 사조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흔히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되기도 하는 정체성을 찾는 작업조차도 호퍼는 관심이 없었다. 호퍼는 1900년에서 1906년까지 뉴욕의 예술 학교에서 수학을 했는데 그곳은 8인그룹( Groupe des Huit)의 멤버 중의 하나인 로버트 헨리(Robert Henri)의 아뜰리에였다. 그리고 곧 이 학교는 아슈칸 스쿨( 일상생활에서 길어낸 통속적 것인 들을 주제로 한다고 해서 ‘쓰레기통 학교’라고 불리는 )이 되어버린다.
에드워드 호퍼는 1906년에 처음으로 빠리에 거주했고 1909년과 1910년에 다시 빠리를 방문한다. 그는 알베르 마르께( Albert Marquet) 와 비슷한 풍으로 빠리의 다리들과 세느강 풍경을 그렸다. 그는 전시회를 찾아 다니고 살롱에 나가면서 펠릭스 발통( Felix Vallotton)의 빛을 찬미했으며 드가의 사물을 보는 각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의 테두리가 이루어졌다.
1910년 미국에 돌아 온 호퍼는 빠리에서 그린 그림들을 선보이지만 이해받지 못하고 거절 당한다.
호퍼는 아수칸 스쿨(Ashcan school)의 美學科에서 조심스럽게 조지 벨로우( George Bellow) 또는 존 슬로안(John Sloan) 같은 화가들에게 접근하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삽화를 그려서 생활을 꾸려갔다. 1912년에서 1914년 사이에 호퍼는 미국식 주제를 다루는 초기의 그림들을 그리고 아주 다른 주제로 ‘푸른 저녁( soir bleu, 1914)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데 이 ‘푸른 저녁’은 랭보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으로 자신의 화가로서의 조건에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삐에로임을 자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15년에는 판화에 눈을 뜨게되어 원근법과 대비법을 공부한다.
디디에 오틴저씨는 또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 호퍼의 예술은 원근법과 대조법같은 테크닉을 통해서 1924년 이후의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화풍을 확실히 하게됩니다. »
그때까지 호퍼는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었고 작품도 단지 두작품만 팔린 상태였다. 1923년에 상황은 돌변하게된다. 호퍼는 글르체스터(Gloucester)로 가서 새로운 영국의 뉴빅토리아식 집들을 나타내는 일련의 수채화 작품들을 그리게된다. 이 작품들은 부르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과 뉴욕의 프랭크 랜 갤러리에서 모두 팔리게된다.
호퍼는 윈스롤우 호머( Winslow Homer, 1836-1910)의 화풍을 닮아 정직하고 진지하다는 평을 받는 작품들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호퍼는 결국 테크닉과 주제로 미국 사회의 궤도에 오르게된다. 호퍼는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자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 삽화 그리는 일을 그만둔다. 호퍼는 1924년에서 1967년까지 그의 신화를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간 100여편의 작품을 완성하게된다.
구경꾼들
호퍼의 화풍은 한결같은 색조, 확고한 색으로 만들어진 구성으로 발전해간다. 때로는 한작품을 완성하는데 1년이란 긴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디디에 오틴저씨가 설명한다. :
« 호퍼는 그림의 아이디어에 감정을 반영합니다. 즉 어떤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 아이디어의 세부적인것들을 현실에서 끄집어내어 형태를 만든 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호퍼에게는 생각하는 시간과 그 생각을 걸러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호퍼의 그림은 생각을 많이 한 후에 그린 그림들이기때문에 결국 아주 추상적으로 되어버립니다. »
1924년 이후 호퍼의 초기작품들은 사막같은 풍경들이다. 그리고 숍 수에(chop suey,1929) 또는 호텔방( chambre d’hotel,1931)같은 작품 속에서 인간군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여성인데(그의 아내 jo가 유일한 모델이었다.) 혼자서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있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1950년에서 1966년까지 작품들은 심리적 차원을 그리고 있다. 인물들의 시선은 늘 그 틀을 벗어나 있으며 절대로 관객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으므로써 관객은 거리를 두고 밖에서 구경하는 구경꾼이 된다. 호퍼의 작품 속의 여자들이 흔히 벌거벗고 있는 이유는 그녀들의 존재가 관능적 쾌락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체가 절대로 유일한 주제가 되지는 못하지만 침대, 창문, 커튼과 같은 타이틀로 전부가 되는 것이다. 호퍼는 여러 작품들 속에서 인간의 내적, 외적 관계를 표현했는데 그것은 같은 그림 속에서 닫혀진 공간이나 기차의 칸막이실같은 것을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풍경이나 빙긋이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풍경과 연결시켜서 표현된다.
에드워드 호퍼의 세계는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것같다. 그는 미국을 상징하는 기차길, 모텔, 레스토랑, 광고, 주유소같은 것을 그릴때 빌딩같은 건축물을 선호하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개인주택들을 선호한다. 호퍼는 현대 도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현대도시가 도시인에게 주고 있는 영향을 간접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호퍼는 분위기의 왕이다.호퍼는 그 어떤 화가보다도 권태, 고립, 고독의 감정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사무실, 밤 또는 뉴욕의 방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부부).
영화에 근접하다.
호퍼의 일상적인 장면들은 몇몇 풍경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영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시, 문학, 철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잇었으며 영화도 많이 보았다. 이러한 것들에서 호퍼는 아이디어와 분위기를 찾아내곤 했다. 호퍼의 작품들은 영화 기획안처럼 틀지워져 있다. 앞으로 호퍼는 영화에도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윔 웬더스(wim wenders) 그리고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속에서 심리적 장식들은 호퍼의 작품 ‘ 철로옆의 집’에서 바로 영향 받은 것이다.
호퍼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연극도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호퍼에게 있어서 인생은 연극이었고 그림은 그 연극의 한 장면이었다.호퍼의 몇몇 작품들이 연극세계(막간, 두 연극 배우)를 주제로 했다면 그의 작품의 내면세계, 사무실, 거리, 카페들은 또한 연출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의 풍경은 연극 무대의 장식에 해당이 되는 것이다. 즉 1942년 작 ‘ 펜실바니아의 황혼’의 정면이나 유령같은 객차가 그런 것들이다. 현실은 허구와 함께 있다. 그래서 호퍼 작품의 애매모호함은 이러한 이중성 속에 머무는 것이다.호퍼는 사실주의로 포장한 표지 속에서 관객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다른 곳이란 1942년에 앙드레 브르통이 제기한 초현실의 세계를 말한다. 앙드레 브르통은 호퍼와 쉬리코(chirico)를 비교할때 ‘초현실’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호퍼는 말이 없는 작가이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이 없는 작가이다.그러한 그의 침묵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관객 스스로가 해석하고 상상하고 작품이 부리는 요술에 내맡기는 것이다.
전시회 장소 : Grand Palais
3, avenue du Général – Eisenhower, 75008 Paris
전시회 기간 : 2012년 10월 10일 – 2013년 1월 28일
문의 전화 : 01 44 13 1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