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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9.03.11 21:35

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102회)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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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제102회)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어때요, 그래도 탈만하지요?”
기남이 허리를 숙여 어머니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재밌기는 한데 눈치가 보여서 말이지. 할망구가 주책없이 젊은 사람들 흉내 낸다고 할까봐.”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기 보이는 어르신들도 바이크 타러 오는 거예요.”
기남의 말에 시선이 주차장으로 몰렸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노인들이 열을 지어 철길을 건너고 있었다. 어머, 멀리서 오셨네. 정아가 버스 앞 유리에 써진 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들이 힘도 좋구나. 어머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저기 저 어른에 비하면 아가씨네요.”
대열 중간에서 부지런히 팔을 내젓는 작달막한 체구의 할머니를 기남이 턱짓으로 가리키며 농을 쳤다. 
“아가씨는 무슨,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네.”
등 굽은 노인의 아장거리는 걸음걸이를 어머니는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걸음을 멈춘 정아가 뒤쳐져서 터덕거리며 오는 은지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기남이 소곤거렸다. 
“어째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바이크가 별로였나?” 
“아니야. 정반대지. 더 타고 싶어서 지금 시위하는 거야.”
“그래? 그럼 지금 얼른 한 번 더 태울까?” 
정아가 급히 기남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러고는 은지에게 다가가 다음에 다시 태워주겠다며 손가락을 걸었다. 구겨졌던 은지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들른 영미가 저편에서 뛰어오며 소리쳤다.
“와, 진짜 재밌네요.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그냥 한방에 날아간 것 같아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여기서 신랑을 구하기로!”
영미의 뜬금없는 발언에 어머니와 기남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영미가 정색했다. 
“빈말 아니에요. 아까 타고 내려오며 진지하게 생각했다니까요. 시집 와서 매일 바이크를 타고 싶어요.”
마침 지나다 귀동냥을 한 나이 지긋한 역무원이 언제든 환영한다며 박수를 쳤다. 
그때였다. 벨소리가 울렸다. 백에서 전화기를 꺼낸 정아가 액정을 확인하고는 영미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구석으로 간 정아가 급히 영미를 불렀다.  
“마담언니야, 네 전화기가 꺼져있어서 나한테 거셨대.”
전화기를 건넨 정아는 차로 가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아는 뭔가 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아까 장 마담의 목소리며 톤이 평소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통화가 길어지면서 영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보였다. 차에서 내려 영미에게로 갔다. 
마침 통화를 막 끝낸 영미가 창백한 얼굴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씨발, 졸지에 금팔찌 차게 생겼다.”
휴대폰을 돌려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방금 매장에 단속반이 들이닥쳐서 쑥대밭을 만들고 갔대.”
순간 이미테이션 매장이 머리를 스쳤다. 
“저걸 어째, 마담언니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
영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담언니는 상관없어. 내가 문제지.”
 정아는 문득 언젠가 영미가 매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지금도 네가?”
“맞아, 내가 매장 대표잖아. 사실 바지사장, 아니 치마사장이긴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어. 아무튼 언니가 지금 당장 비행기로 들어오라고 한다.”
“어쩌면 좋아. 장 마담은 뭐래?”
“변호사 구해놨으니 일단 출두해서 조사를 받으래. 증거가 명백하니 그냥 상표법 위반한 거 인정하고 구치소에 들어가 있으면 최단 시간에 빼주겠대.”
“아니, 단속이 들어오도록 회장님과 마담언니는 뭐 하신 거야?”
“글쎄, 뭔가 찜찜하긴 해. 전에는 단속반 뜬다는 정보를 그쪽에서 미리 줬는데...”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기남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영미가 표정을 바꾸며 그러잖아도 차로 가려던 참이라고 얼버무렸다.  
“우리 근사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강릉으로 넘어가 고성까지 올라갔다 옵시다. 거기 통일전망대까지 보고 오려면 서둘러야 해요.”
기남이 앞장서며 말했다. 영미가 정아에게 눈치를 주었다. 쭈뼛거리던 정아가 기남을 불러 세웠다.  
“저기, 있잖아. 오늘 일정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 친구가 급히 들어가야 하거든.”
기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얼른 영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오면서 다른 선생에게 대타를 부탁했는데 수강생들이 저 아니면 안 된다고 난리라는군요. 그래서... 가봐야 해요. 이 죽을 놈의 인기를 어쩌면 좋지요?”
영미가 태연하게 엉너리를 쳤다. 
“저런! 근데 어차피 오늘 비행기는 끝났는데요. 그러니 가셔도 내일 아침에 가셔야 합니다. 아시죠? 원주공항에서는 하루 한 편뿐인 거.” 
“어머, 그런가요? 그러면 안 되는데. 게다가 내일 좌석이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정아가 휴대폰을 꺼내 항공사로 전화를 걸었다. 우려한 것처럼 내일은 물론 이번 주내내 만석이었다. 
일단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기남이 식당으로 가자고 우겼으나 어머니가 말렸다. 집에서 고기를 굽기로 했다. 기남과 어머니는 정육점에서 고기값을 치르며 또 한 차례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급히 점심상이 차려졌다. 페달을 밟느라 힘을 썼으니 고기가 구워지기 무섭게 불판이 비워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다들 젓가락을 들고 깨작거렸다.    
영미는 터미널로 가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기로 했다. 김포공항에는 비행편이 많기 때문이었다. 정아는 영미가 혼자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전화로 두 자리를 예약했다. 같이 가봤자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곁에 친구가 있으면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옆에서 예약을 지켜보던 영미가 급히 제동을 걸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며 전화기를 빼앗아 예약을 정정했다.  
“넌 휴가 충분히 즐기다 와. 가서 네 강의까지 내가 다 소화할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영미가 상기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영미의 손을 잡고 토닥거렸다.
“더 놀다가 가면 좋은데, 그래도 인기가 많다니 좋겠어.”
“농담이에요, 어머니. 사실 정아가 저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요. 정아 실력에 비하면 저는 정말 새 발의 피거든요.”
정아는 두 사람의 대화에 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영미의 빤한 거짓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긴 우리 정아가 학교 다닐 때도 공부를 잘 하긴 했어.”
어머니가 흡족한 표정으로 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남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영미가 어머니를 안고 작별 인사를 했다. 
“어머니, 꼭 다시 올게요. 그날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영미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어머니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신랑감 구해 놓을 테니까 늦지 말고 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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