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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9.04.29 00:04

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108회)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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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108회) 


바람의 기억



8. 낙화의 시간



등받이와 테이블을 원상태로 돌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주변이 수런거렸다. 영미는 자세를 고치며 내려진 커튼을 위로 올렸다. 눈이 부시도록 강렬했던 구름 위의 석양은 이제 완전히 사위어 있었다. 완만하게 하강하던 비행기가 왼편을 낮추며 선회했다. 불현 듯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영미는 창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의 전구들이 개나리 꽃무더기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투사된 불빛들이 바람을 탄 들불처럼 흔들렸다. 문득 이게 비행기가 아니라 불빛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는 부나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흠칫 불안감이 엄습했다. 복부를 가로지른 안전벨트가 완고한 포승줄처럼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저편에서 눈에 익은 노인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얼른 봐도 휠체어를 탄 아버지의 모습이 분명했다. 내가 구속되면 아버지는 어쩌지? 만약 실형이 선고된다면? 동생의 영치금은 또 어쩌고.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관자놀이 지끈거렸다.  


바퀴를 내리는 진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상의 사물들이 점점 부피를 키웠다. 오른편으로 공항 청사가 또렷하게 보였다. 다소 불안하게 착지한 비행기가 속도를 줄였다.  


연결 통로를 빠져나와 청사로 들어선 영미는 도착 출구로 향하다 급히 걸음을 멈췄다. 수사관이 수갑을 만지작거리며 출구를 지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사각지대로 이동해 잠시 숨을 골랐다. 다른 비행편이 도착하면 승객들이 한꺼번에 몰릴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하기로 했다. 주변이 혼잡해졌다. 고개를 내밀어 출구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종이 피켓을 들고 늘어서 있는 여행사 직원들 사이로 눈매가 서늘한 사내 몇이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들이 나를 노리는 수사관이 아니기를! 영미는 간절하게 마음으로 중얼거리며 단체 여행객 틈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걸었다. 노출된 열 걸음 정도의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동문을 통과하고 마중객 라인을 무사히 지나쳤다. 청사 밖으로 나오는 동안 누구도 제지하거나 말을 붙이지 않았다. 택시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라이트를 밝힌 자동차들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올 때마다 영미는 습관처럼 고개를 돌렸다. 초록 신호가 들어오자 서둘러 첫걸음을 뗐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불쑥 손이 들어와 잡고 있던 캐리어를 낚아챘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뒤에서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무쟈게 빠르네, 깜빡 놓칠 뻔했잖아!”


영미는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주저앉았다.  


“아, 진짜, 뭐야! 오줌 쌀 뻔했단 말이야!” 


일어선 영미가 주먹으로 경철의 가슴을 두어 차례 질렀다. 주위의 시선들이 두 사람을 흘겼다.  


경철이 앞장을 섰다. 캐리어를 끄는 경철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콧등이 시큰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홀로 세상에 버려진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는데, 이런 위로가 있나 싶었다. 


“어떻게 알았어? 이쁜이 오는 거.”


“그걸 모르냐, 척이면 척이지.”


“피, 가게는 어떡하고?”


“우리 영미가 오는데 손님이 문제야?”


입에 바른 소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미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옆에 바짝 붙어서 팔짱을 꼈다. 


“빨리 가자. 두 분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셔.”


영미는 강 회장과 장 마담이 경철의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이해했다. 두 사람이 이 시간에 경철의 가게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다는 건 그만큼 사안이 심상치 않다는 반증일 터였다. 


“오빠도 소식 들었지? 단속반 떠서 다 뒤집고 간 거.”


“아다마다. 가서 보니 이미테이션만 귀신 같이 골라서 싹 쓸어 갔더라. 미스 박이 그러는데 이렇게 큰 자루로 스물네 개를 담았대.”


경철이 팔을 돌려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그렇게나 많았어? 씨발, 좆 됐네.”


“비관할 거 없다. 잘 대처하면 돼. 옛날에 마담 누님도 경험을 했으니 도움을 주실 거야.”


경철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넣으며 말했다. 경철이 어디론가 통화를 시도하는 사이 먼저 차에 올랐다. 머리 뒤로 팔을 넣어 베개를 삼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 몸이 노곤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차가 흔들렸다.   


“복이 없어도 이리 없을까. 겨우 숨 좀 돌릴만하니 또 이렇게 목을 조이네.”


영미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힘내라. 이번 일만 잘 넘기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좋은 일? 지금 곰 피하니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잖아. 오빠도 들었지? 그 지랄 맞을 법이 곧 통과된다는 거.”


“어려워지기는 하겠지, 그래도 막상 닥치면 무슨 타개책이 있을 거야.”


“타개책은 무슨. 우린 그냥 엿 되는 거야. 정부에서는 다른 일을 하라고 그러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나? 화류계 특성이 있잖아. 아무 일이나 못하는 거. 몸뚱이만 굴리며 살아온 우리가 당장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있냐고. 어디 눈 먼 남자라도 하나 있으면 슬쩍 옆구리 찔러 시집을 가면 최곤데 그건 언감생심이고.”


눈에 익은 간판이 보였다. 언제 봐도 반가운 초록색 글자. 영미는 경철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있던 직원이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장 마담을 발견한 영미가 얼른 허리를 굽혔다. 등을 지고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았다. 강 회장이 와 있는 걸로 이해하고 있던 영미는 낯선 남자의 출현에 긴장하며 주춤거렸다. 장 마담이 영미를 안아주고는 앞의 남자를 가리켰다. 


“인사드려라. 너를 도와주실 변호사님이시다. 회장님이 아끼시는 실력 있는 분이지. 옛날 내가 같은 건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주 깔끔하게 처리를 해주셨어.”


영미는 공손하게 허리를 접었다. 그가 자리에 앉은 채로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권했다. 장 마담과 비슷한 연배로 양복이 잘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자리에 앉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고, 미인이시구먼. 자, 긴장 푸시고. 뭐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닙니다. 아마 내일 청에 들어가게 되면 검사가 상표법 203조를 들먹이면서 7년의 징역을 살리느니 1억 벌금을 때리느니 하면서 잔뜩 겁을 줄 거예요. 그렇지만 쫄지 마세요. 그냥 침착하게 대응하면 됩니다.”


경철이 마른안주와 맥주를 내왔다. 영미가 두 사람의 잔에 술을 채웠다. 


“다만 좀 마음이 걸리는 게 있는데, 뭐랄까, 이번 단속 건은 정치적인 속내가 다분하다는 거예요.”


그가 잔을 들었다. 장 마담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영미는 맥주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서 잔에 입술만 댔다가 뗐다. 


“영미 씨라고 했지요? 영미 씨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단속은 사실 우림각을 겨냥한 겁니다. 더 정확히는 강 회장님이지요. 이번에 특별법이 통과되고 시행이 되면 우림각은 더 이상 문을 열 명분이 없어요. 근데 강 회장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법이 통과되도록 그냥 보고만 있을 분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회장님의 목을 죄는 수단으로 이번 단속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겁니다. 그래서 영미 씨가 검찰청에 나가 조사를 받을 때 그 점을 명심해야 해요. 이 가게 실소유주가 누군지를 밝히려는 유도신문은 물론이고 어쩌면 역 제안이 있을 수 있거든요. 당신은 바지사장인 거 뻔히 안다. 그러니 바른대로 말하면 풀어주겠다. 그런데 그건 함정이에요. 걸려들면 처벌은 처벌대로 받고 우림각까지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중심을 딱 잡고 버티세요. 그럼 벌금이나 집행유예로 나올 수 있도록 제가 은밀하게 손을 쓰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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