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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의 시사 칼럼
2019.03.05 18:26
3.1 독립운동과 통일에의 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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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의 시사 칼럼 (8회) 3.1 독립운동과 통일에의 길 대통령이 거주하고 있는 청와대 터의 기원은 고려 숙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의 천도 주장이 있었고,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에서 궁궐터만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경복궁을 건설하면서 현재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으로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사라진 후 한동안 방치되었다. 고종대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 지역에도 각종 전각들을 세우고 과거장이나 권농, 연무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네 개의 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한 건물의 이름이 "경무대"였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 전각들을 헐고 공원부지로 만들었으며, 1937년 이 지역을 조선 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구 본관 자리에 관저를 세우게 되었다. 일제는 이 때 보천교를 강제 해체하면서 본전을 뜯어서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의 건설재료로 쓰고, 일부는 동대문으로, 중심 건물인 십일전의 청기와는 일제 경무대 건물 기와로 사용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이곳에 있던 경무대의 이름을 따서 "경무대"로 명명하고 집무실 겸 관사로 사용하였으나, 4.19혁명 후 윤보선 대통령은 1960년 12월 “경무대가 전(前) 정권 때에 폭정을 자행한 곳으로 국민들에게 원부(怨府)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청와대로 개칭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개명하였다. ‘청와대’란 명칭은 본관 건물에 파란기와 즉, 청기와[靑瓦]를 덮은 데서 유래했다. ▲ 정읍에 있던 보천교 본소 중심건물인 십일전은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 해체되어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건설재료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1938년경 사진으로 십일전 기둥으로 조계사 대웅전을 짓는 모습이다. ⓒ 조계종 홈페이지 보천교는 일제 강점기에 600만의 신도를 가진 민족종교로서 독립운동의 자금원으로서 막후 영향력이 컸던 단체다. 조선일보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당시 언론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보천교 계열은 총 147 건으로 타종교를 모두 합한 항일운동 기사건수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보천교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1923년 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국내와 상해, 만주.북경.간도일대 등 각지에서 독립활동을 하는 100여 개의 단체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보천교'에서도 진정원 간부인 배홍길(배치문)과 김종철, 청년회 대표인 강홍렬(강일) 3명을 파견하여 국민대표회의에 참여시켰다. 강홍렬(강일)은 3.1운동 때 영남지역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합천지역에 배포했고 합천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배홍길(배치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두 사람은 국민대표회의가 끝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 활동을 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도 보천교 신도였으며, 홍범도, 이범석 장군과 함께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은 보천교에서 5만원 (약 3억원)의 독립자금을 지원 받았다.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불교계의 거목 탄허스님의 선친인데,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거금 10여 만원을 숨기고 있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했고, 상해임시정부 간부 라용균 제헌의원은 보천교 간부 임규로부터 5만원의 자금을 건네 받아 상해 임정에 전달하였다고 증언했다. 백범 김구 주석은 "상해임정은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 고 밝혔다. 일제 치하 우리 나라의 종교계는 민중의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헌을 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기미독립선언문’의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목사 등 기독교인이었고, 천도교와 불교 지도자가 각 15명, 2명이었다. 만일 천도교나 기독교의 조직력과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3.1 독립운동의 신속한 확산과 장기적인 지속이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각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종교나 교리, 그리고 교파를 떠나 머리를 맞대고 민족의 운명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치단결했다. 그렇다. 민족이 없고 나라가 없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이랴? 특히 3.1 독립운동 기간 동안 구금된 사람의 25%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이는 1884년 복음이 들어온 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년 동안 기독교가 ‘사람’을 키우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기독교는 각종 교육시설을 세우고, 신문을 창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섰으며,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에게도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기독교계의 이런 활동은 당연히 일제에게 큰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 등을 통해 기독교는 이미 일제의 관리 대상이 되었고, 기도회와 예배를 방해하고 교회 출입을 간섭했다. 종교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탄압은 종교계가 만세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3.1 독립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과 교회가 많았던 이유다. 그리고 유래가 없이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교회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교회 폐쇄와 신도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전혀 꺽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는 민족 종교로서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거듭났으며, 십자가 정신으로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웃’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제 기독교는 대한민국 종교계의 중심에 있다. 지난 3월 1일 뉴몰든에서 있었던 3.1 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남북한 동포 명의로 통일선언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3.1운동의 자주정신과 독립정신의 유산을 계승하여 한반도와 한민족이 빠른 시일 안에 평화로운 방식으로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주, 독립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엄숙한 시대적 사명”이라고 선언했다. 통일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에서도 나타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통일을 준비하는 ‘신한반도체제’로 나가자”면서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국민과 함께, 남북이 함께, 새로운 평화협력의 질서를 만들어 내자”고 말했다. 그리고 “통일도 먼 곳에 있지 않다. 차이를 인정하며 마음을 통합하고, 호혜적 관계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다.“고 말했다. ▲ 제100주년 3·1절 정부 중앙 기념식 그렇다 우리가 통일을 바라고 남북한이 함께 번영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차이를 인정하고 마음을 합쳐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아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지 않겠는가? 그것이 종교든 종파든 신념이든 문화든 언어든 음식이든 심지어 음식을 먹는 방법이든 우리는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나와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남을 차별하려 한다면 그 차별의 총구는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문대통령의 3.1독립운동 기념사의 일부다.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될 것입니다. 새로운 100년은 그때에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하재성 jaesungha@yahoo.com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킹스톤 시의원 (Councillor of Kingston upon Th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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