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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2 02:56
구식이 살아있는 공간에서
조회 수 1567 추천 수 0 댓글 0
길거리를 걷다가 예쁜 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밖으로 테이블들이 놓여져 있는 가게를본다면 그건 분명 펍(Pub)이다. 영국의 펍을 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듯 하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깔끔하게 정리된 소품 등이 너무나 세련되게 보이는 까페들 사이에 하나씩 끼어있는 펍의 모습은 꼭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이나 드나들 것 같은 오래된 구식의 느낌이다. 가게 외부에는 간판이 안보일 정도로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꽃 화분들이 있고, 가게를 들어서면 나무 바닥과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데 대부분 조명도 어둡고 벽에 걸린 소품들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라 전혀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노인들이나 넘쳐날 듯 보이는 펍의 분위기와 다르게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다는 것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맥주 한잔 앞에 놓고 수다를 떨며 그들 하루의 피로를 그곳에서 푼다. 가끔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도 보이는데 그 아이들 조차 펍이라는 공간에 익숙해 있어 그곳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주문할 수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를 이미 아는 듯 보인다. 영국의 펍에 들어서면 과거로 들어가는 듯하다. 영국과 펍, 영국인과 펍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영국 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의 식민 통치 시절부터 여행객들이 묵는 숙소Inn)에서 아일(Ale)이라는 술을 만들어 판 것이 시초이다. 18세기에는 Coaching Inn 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19세기에 들어서 노동자와 여행객을 위한 Pub이라는 형태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펍이라는 것은 잠도 재워주고 술도 팔고 밥도 팔던 우리나라의 주막집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펍은 Public House를 줄인 말로 말 그대로 영국인들을 위한 공공장소이다. 영국 서민의 휴식처이면서 사교공간으로 자리잡게 시작했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뉴스나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들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털어 놓는다. 펍에 가는 시간조차도 일정하지 않다. 점심시간 때에도 사람들은 펍으로 향한다. 점심식사 후 간단한 맥주 한잔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힘을 낸다. 사실 옛날의 펍은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여자의 출입을 금하고 하다못해 육체 노동자와 정신적으로 피로한 엘리트 노동자간에도 ‘Public’과 ‘Salon’이라도 하여 출입문을 달리해 놓고, 내부에도 벽을 세워 다른 계급끼리 술을 마신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펍을 드나드는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펍의 전형적인 모습은 이러하다. 문을 열자마자 중앙에 맥주 판매대가 보이고, 테이블이 야외에 놓여있다. 어떤 곳은 간단한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잔디광장이나 어린이 놀이기구도 있다. 더욱 더 놀이문화에 신경 쓴 펍은 당구대와 더불어 갬블링 머신, 전자 오락기 등을 갖다 놓기도 하고 흔하지는 않지만 노래를 할 수 있게 마이크시설이 갖춰진 곳도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오락시설과 함께 ‘놀이’라는 것에 흠뻑 빠져 들기도 한다. 펍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야외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날씨 변덕이 심한 영국에서 야외공간은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는 부분일 수 있으나, 영국인들은 야외에 펼쳐진 잔디밭과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며 가끔씩 나타나는 햇살에 환호한다. 사실 우리는 조금만 추워도 야외공간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다르다. 웬만한 추위가 아니고는 실외에서 식사나 맥주를 즐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끔씩은 실내가 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펍 밖으로 맥주 한잔 들고나와 빽빽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풍경도 볼 수 있다. 테이블이나 의자가 없어도 친구들과 무리를 만들어 벽에 기대어 있거나 낮은 턱에 걸터앉아 자기들만의 공간을 금새 만들어 버린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길 중앙에 떡 하니 서서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담소를 나눈다. 그렇다고 두꺼운 외투를 준비해 오는 것도 아닌데 얇은 옷차림에 어떻게 그렇게 추위에 상관없이 여유롭게 앉아 웃을 수 있는지 의아해 한적도 많다. 그런 영국인의 습성 또한 야외 펍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다. 펍마다 영업시간이 조금씩 다르긴 하나 대부분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운영한다. 펍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재미있는 대화와 질 좋은 맥주다. 맥주가 아니고도 칵테일이나 와인 등을 마실 수 있으나 그래도 사람들은 맥주를 가장 선호한다.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소수 ‘Free House’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펍은 6대 맥주를 취급한다. 요즘 맥주들은 대부분 높은 압력에서 인공적으로 숙성 발표시킨 것인데 구식 맥주의 소멸에 반대하는 영국 소비자들이 캠페인을 벌여 요즘도 펍에서는 구식의 그 진짜 맥주 맛을 즐길 수 있다. 보통 병이나 통 속에서 기계적으로 숙성 발표시키지 않은 진짜 맥주는 더 쓰고 김빠진듯한 맛이 난다고 한다. 직접 카운터로 가서 바텐더에서 주문을 하고 즉시 계산을 하는 것 또한 펍의 특이한 모습이다.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다가 본인의 술이 떨어지면 옆에 친구의 술잔을 확인한 후 동전 몇 개를 들고 바(Bar)로 가서 맥주를 사온다. 일반 레스토랑이나 까페와 다른 이 주문 방법은 펍을 더욱 사람냄새가 나게 만든다. 직원이 들이미는 계산서를 보면서 각자 주문한 만큼 돈을 나눠서 낸다든지, 아니면 한 사람이 멋지게 전부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펍은 다르다. 내 잔 뿐만 아니라 친구의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직접 주문을 하러 가고, 맥주를 받아 친구에게 서빙을 하는 그 과정은 ‘영국인스럽다’라는 표현과 어울리지 않지만 펍에서만큼은 영국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모습이다. 맥주 한잔의 고마움은 다음 잔을 채워줌으로써 전해진다. 펍은 영국인에게 있어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문화이고, 대중공간 속에 녹아있는 그들의 긴 역사이다. 또한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을 담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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