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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8:32

서쪽 끝, 예술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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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람들은 은퇴 후 스페인이나 그리스, 호주 등에서 살고 싶어 한다. 왜냐면 그런 나라들은 영국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강한 햇살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완벽한 날씨 덕에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싼 값에 구할 수 있고,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살기에 너무 좋은 곳들은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도 남부 쪽 사람들은 일을 하는 것보다 인생을 즐기자는 생각이 많고, 이탈리아 또한 산업, 경제도시가 많은 북부의 사람들보다 남부 사람들의 삶이 경제적으로는 북부사람들에게 못 미치더라도 훨씬 여유 있어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럴 것이 집 뜰에서도 몇몇의 채소나 과일을 심어 놓으면 쉽게 수확을 거둘 수 있고, 농장에서 금방 가져온 싱싱한 것들이 시장에 가득하며, 하루 종일 따뜻한 햇살이 비춰주는 곳이라면 누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없으니 말이다.

이에 비하면 영국은 정말 척박하다. 하루에도 비가 오다가, 햇볕이 내리쬐다 가끔씩은 우박도 오니 이런 날씨에서 어떻게 농사가 가능하겠으며, 따뜻한 나라의 사람들처럼 가슴 속에 삶을 즐기기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영국인은 영국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들고 빗 속을 걷거나, 비를 바라보며 비 오는 날의 운치를 느끼는 것 보다 곧 그칠 것을 알아 우산 없이 그냥 일상생활을 사는 묵묵함을 가지고 있고, 싱싱한 과일과 채소 등 음식재료를 사다가 로즈마리와 파슬리와 같은 향이 강한 잎을 넣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행복을 찾기 보다 수입된 과일, 이미 만들어 진 음식을 사다가 간단한 식사로 배고픔을 달래는 게 전부인 것처럼 음식을 해치우고 만다.

하지만 이런 영국 안에서도 강한 햇살과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콘웰지방의 St Ives이다. 한 달 내에 전시가 계속 잡혀있어서 한동안은 정말 바빴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갤러리로 운반, 디스플레이, 그리고 홍보 등 작업을 끝내고도 할 것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이제 여유가 생겨 어딜 잠시 다녀올까하는 생각이 다시 들고 있는 중이다.

작년엔 영국인 친구 몇 명이 잉글랜드 남서쪽에 있는 St Ives를 추천에 그곳을 다녀온 기억이 난다. 그때의 여행기억을 떠올려 본다.

나도 그 작은 도시에 대한 소문은 들었었다. 영국이지만 St Ives의 바다는 지중해의 바다처럼 맑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색을 가졌으며 햇살이 많아 언제나 따뜻한 느낌이 숨쉬는 곳이라고 했다. 또 리버풀, 런던과 함께 테이트 모던 갤러리가 있는 곳으로 거리 곳곳에서 예술가의 숨길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스 친구와 술을 한잔 하면서 St Ives에 갈 거라고 하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면서 자기가 그리스 인이지만 바다 색깔은 정말 그리스에 있는 어느 바다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칭찬하였다. 그래서 St Ives를 다녀 오기로 했다. 물론 이 짧은 여행을 같이 해 줄 친구도 한 명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 후배면서 여기서 공부를 같이 한 동생이다. 혼자 하는 여행도 좋은 점이 있지만 누군가가 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는 순간 같이 있어 준다면 그 감동은 두 배, 세 배가 되는 것을 알기에 이번엔 꼭 친구가 있었으면 했었다.

St Ives로 가는 기차는 런던 페딩턴 기차역에서 출발한다. 나에게는 워터루 역이나 킹스크로스 역처럼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막상 가보니 가게들의 종류도 많고 티켓 예매소 등이 다른 역보다 오히려 잘 되어 있어 처음 가 본 곳이었지만 기차를 타기 전 역에 머무르는 것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 5시간을 넘게 가야 St Ives에 도착한다. 런던에서 남서쪽이라고는 하나 영국 땅끝마을과 근접해 있기 때문에 브라이튼이나 본머스와 같은 도시처럼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런던에서 벗어나 곧 전형적인 영국 시골 풍경이 창 밖으로 펼쳐졌다. 여행은 역시 여행을 준비하는 것부터 여행지로 향하는 길까지 이미 여행을 하는 것이다. 양 목장이 유난히 많아 갓 태어난 양들의 모습을 기차 안에서도 구분이 될 만큼 쉽게 볼 수 있었다. 한 3시간쯤 가다 보니 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가 나왔고, 그곳에는 지중해 바닷가에서 보던 요트들이 많이 정착되어 있었다. St Erth까지 도착하는 데 5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고 여기서 St Ives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역은 정말 한국의 작은 마을 앞에 있는 기차역 같았다. 플랫폼도 두 개 밖에 없으며 역무원들도 전혀 바빠 보이지 않는다. St Erth에서 St Ives고 가는 것은 기차로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데, 해안선을 따라 철길이 놓여 있어 St Ives에 도착하기 전 그렇게 친구들이 찬사를 보내 던 그 바다를 미리 볼 수 있었다. 정말 맑은 색이다. 창 밖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St Ives 또한 다른 마을과 달랐다. 다른 영국도시나 마을과 달리 따뜻함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습기 때문인지 마을의 지붕에는 노란빛이 나는 이끼가 덮여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바다를 따라 세워진 집들이 모두 노란색 지붕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처럼 햇살이 강한 곳의 집들은 빛을 반사하기 위해 벽에 흰색을 칠하는데 여기 St Ives의 집들도 영국 내 다른 지방처럼 갈색의 벽돌이나, 회색 계열의 색을 사용하지 않고 깨끗한 흰색이 칠해져 있었다. 정말 영국스럽지 않은 풍경이지만, St Ives 거리 곳곳에 모습은 전형적인 영국 시골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은 창문과 문, 레이스로 만든 창문 커튼들, 그리고 아기자기 하게 물건들을 걸어 놓은 예쁜 가게들… 영국의 모습이었다. 바다내음과 갈매기소리 때문에 더욱 특별해 지는 모습들이다. 거리를 구경한 후 씨푸드를 먹은 뒤 바닷가에 누웠다. 다행히 바람은 약간 찼지만 따뜻한 햇살 때문에 티셔츠와 청바지 하나만 입고 누워 있어도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따스한 봄 같았다. 난 바닷물에 발만 담갔는데도 너무 차 금방 나왔는데, 아이들은 팬티만 입고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였다. 가족들이 함께 모래성을 만들고 아이들이 바다에서 노는 모습들은 나를 더욱 편안하게 만들었다. 정말 평화롭다.

St Ives는 예술가의 마을이다. 과거 많은 예술가들이 여기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영국 미술사를 보면 St Ives 인상주의 학파가 따로 있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영국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테이트 모던 갤러리가 있다. 갤러리는 바다를 향해 세워져 있으며, 햇살이 건물 내 들어올 수 있게 중앙 홀의 벽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 달리 현대미술보다는 풍경화나 인물화와 같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현재 전시 중인 작가의 작품도 St Ives의 바닷가를 그린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지만 현대미술을 하는 나는 작업을 임하면 약간은 투쟁적으로 되고, 갤러리에서 현대미술작품을 보면 비평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여기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풍경화들은 날 평화롭게 만들었다. 지루할 수도 있는 단순한 풍경 그림이 어떤 창조적인 그림보다 좋아 보였고, St Ives는 이렇게 나를 안정되게 만들었다. 내내 정신 없이 작업만 하다가 전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찾은 이 곳은 정말 영국 안의 천국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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