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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늦었지만 어느덧 영국 땅에 발을 디딘 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작년 이맘 때쯤 썼던 ‘영국 2년차’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며 지난 1년간 걸어왔던 길을 가만히 뒤돌아본다.

평생 넥타이 매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건만, 어느새 대형 빌딩에서 양복입고 샐러리맨으로 일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던 지난 1년. 사실, 필자로서는 음악과 글쓰기라는 진짜 사랑하는 일들을 유지시켜주는 일종의 수단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지만, 만약 평범한 직장 생활만이 내 삶의 전부였다면 그 삶은 지금보다 훨씬 불행했을 것 같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갖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이 또한 부딪히며 배워야 하는 세상살이의 중요한 과정이라 여기며 소중한 경험으로 삼으려 한다.

어느덧 100회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서른 즈음에’와 ‘시네마 천국’, 가끔 일상에 지칠 때면 ‘서른 즈음에’ 이전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그 당시의 내 모습, 내 마음들을 되돌아보곤 한다. ‘시네마 천국’을 쓰면서 영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영화 감독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는 영광도 누렸다. 취재를 다니면서,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 지난 1년 사이에도 성주그룹 김성주 회장, 가수 윤도현, ‘바람난 가족’ 임상수 감독, 외국 뮤지션들 등 참 많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웠다. 요즘 한국에는 너무나 훌륭한 시민 기자들, 블로거들이 넘쳐나는 까닭에 아마 한국이었다면 필자 같은 부족한 글쟁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을 텐데, 그래도 아직 영국에는 한국인 글쟁이가 많지 않아서 이렇게 분에 넘치게 좋은 기회들이 허락되는 것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음악 활동을 통해서도 지난 1년 동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이번 가을에 있었던 두 번의 큰 연주는 이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전 세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두 번의 국제 행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순서로 연주를 했는데, 한 번은 행사 장소였던 리버풀, 바로 비틀즈의 도시인 리버풀에서 가야금과 기타 듀엣으로 비틀즈의 명곡 ‘Let it be’를 연주했다. 마지막 곡인 ‘아리랑’에서는 천 명 가량이나 되는 전 세계 관객들이 한국 참가단이 나눠준 태극 부채를 흔드는 진풍경을 연출, 연주 하면서도 너무나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최근 연주를 했던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서는 Clyde Auditorium이라는 홀에서 역시 한국을 소개하는 연주를 했는데, 연주자 대기실에 걸려 있는, 이전에 해당 공연장에서 연주를 했던 뮤지션들의 사인이 담겨 있는 액자를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비킹, 퀸 같은 전설 속의 거장 뮤지션들이 공연을 가진 바로 그 같은 무대에서 내가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특히, 글라스고 공연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레퍼토리로 준비한 ‘홀로 아리랑’을 선보였던 공연이었다. 김장훈은 자기 돈을 들여서 해외 신문에 독도 광고를 실었는데, 생각해 보니 세계 각국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와 앉아있는 자리가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물론, 정치적인 의도로 비쳐지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이 곡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동해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섬에 대한 노래라고 관객들에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록 독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여줄 수 없지만, 이 노래를 통해 우리 한국인들에게 독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거대한 홀에서 가야금과 기타의 듀엣과 함께 울려 퍼지는 하모니카 선율로 ‘홀로 아리랑’을 연주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중에 한국측 관계자분을 통해 들었는데, 일본 대학생 그룹이 연주 도중 나가더라고 하시면서, 그래도 연주 잘 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잠시 영국이라는 나라를 떠나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매 순간을 지내면서 결국 이 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확신이 여러 번 들었다. 내가 가장 잘하고 잘났기 때문은 결코 아니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들,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가 바로 이 곳에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놀랍고 멋진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설레임으로 고단한 일상에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속, 소설 속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철없는 바램을 가져 왔는데 문득 뒤돌아 보면 제법 드라마틱한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인위적으로 의도한 바는 전혀 없다. 다만, 매 순간 가장 솔직한 가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남들 시선이나 사회와 세상의 틀과 편견에 구속당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뿐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가치보다는 내가 진정으로 여기는 가치들을 잃지 않기 위해, 나만이 꿀 수 있는 꿈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드라마틱 하다는 게 결국 무엇인가? 사람들이 보통은 타협하고, 눈치보고, 두려워하고, 그래서 결국 포기하면서 대다수처럼 따라 사는 것을 인생의 규칙으로 삼을 때 그것을 과감이 초월하여 자신만의 규칙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결국 삶을 드라마틱한 여정으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 얻는 크고 깊은 행복만큼이나 또 그 만큼의 눈물과 마음 아픈 일들도 역시 공평하게 주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30대 남성이 생활 하면서 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 싶지만, 참 많은 눈물을 쏟았던 지난 1년이었다. 하지만, 그 눈물마저도 이 아름다운 여행길의 한 부분이라 여기며 이제는 눈물 흘리는 것 조차 사랑하려 한다.

영국 3년차, 앞으로 또 어떤 여행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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