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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먼 나라로 가 성공하려...
by 한인신문 / on Apr 13, 2009 06:07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먼 나라로 가 성공하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그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아버지의 재산을 술과 여자, 향락으로 다 날려버렸다. 비유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에 자기 육신의 향락에 빠져 절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전에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우리는 긴장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존재, 두려운 존재였다. 식사할 때도 아버지의 그릇과 수저, 그리고 밥과 찬은 다른 가족들과 좀 차등을 두었다. 어른이란 말이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철이 들었다는 기준은, 다른 것보다도 어른을 알아 모신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어른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는다. 어른을 생각해서, 어른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꺾곤 했다. 그래서 당시의 사회는 인정 많고 인간다우며 미풍양속이 있는 공동체였다.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와 차별이 되는 정신세계가 있었다. 지구촌 구석구석 권위주의가 배제되고 인권의 강조와 민주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는데, 과연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분명히 나아진 것들도 많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크다. 인권이 강조되면서 개인의 의견은 지위가 격상되었고, 누구나 자기 목소리의 볼륨을 키울 수 있다. 누구도 자기의 뜻이 관철되기 전에는 승복하지 않는다. 이념이 아닌 이익을 위한 전쟁이 무차별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젠 이웃이 누구인가? 건물의 높이 때문에 일조권 재판을 몇 년씩 하는 존재가 이웃인 것이다. 전에는 동네일은 이치에 밝은 어른이 나서서 교통 정리하듯이 정리하면 해결되곤 했는데, 이제는 누구도 그런 어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촘촘하게 잘 짜여진 제도 속에서 마음은 무질서와 혼돈(Chaos) 속에 사는 존재가 현대인 아닌가. 자기 목소리가 크고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크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선택을 하는데, 그것이 자기를 망케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뜻에서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에 간 아들이 자기 욕구를 절제할 힘이 없어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 재물과 시간을 허비한 성경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사회나 개인이나 마음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세워져 있지 않으면 절제할 수 있는 기능이 상실된다. 권위는 질서를 위해서 필요하다. (자기 이익을 위해 권위를 이용할 때에 권위주의라는 폐단에 빠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집안의 권위자다. 그가 사랑으로 집안을 다스리면 아름다운 가정이 된다. 마음에서 어른의 존재, 권위자가 배제된 분위기, 그것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 같고 편해진 것 같지만, 조만간 피가 피를 뒤대임하는 비극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애비 없는 자식’이란 말이 있듯이 ‘애비 없는 사회’라고 말하는 식자들이 있다. 모든 일에, 모든 존재에 질서가 있듯이, 인간의사회 역시 그렇다. 구성원들 개개인이 마음의 중심이 잡혀 있어야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아버지란 존재다. 옛날 임금들은 자신을 백성의 아버지로 여겼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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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news-강운학 목사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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