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률
1999년 컴퓨터 정보통신학부 1학기를 다니던 중 무작정 외국행 결심
1999년 7월 유학을 위해 군 자원입대
2001년 10월 헝가리 유학, 헝가리 어학원
2004년 9월 악기제작학교 입학준비, 기본적인 현악기 수리 사사
2004년 여름 HANGSZERÉSZKÉPZŐ SZAKKÖZÉPISKOLA (리스트 페렌츠 악기제작학교) 입학.
                   (http://www.lfze.hu/hp/intezmenyek/index.html)
2007년 여름 Benkő Szilárd, Konya Lajos, Mezei János등 여러 장인들에게 사사 후 한국인 최초 졸업
현재 런던 유학 중, 헝가리와 영국, 한국을 대상으로 현악기 딜러 및 제작, 복원, 수리사로 활동 중

유로저널: 안녕하세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본고장에서 현악기 제작 수시를 공부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부터 시작해 볼까요?

고종률: 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피아노학원, 바이올린, 첼로, 성악 등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죠. 그러다 아버지께서 중학교 3학년인 제 손에 악기사에서 빌린 첼로 한 대를 쥐어 주셨어요. 빌린 악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춘기 시절 접한 악기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전 첼로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IMF가 터지기 1년 전인 98년 저로서는 첼로에 대한 꿈을 접고, 고3수험생으로서 일반 대학 진학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련 때문인지 군복무 중 음악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부모님께서도 찬성해 주셨죠. 하지만, 저도 솔직히 악기제작 분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헝가리에 온 뒤부터 입니다. 아무 인맥도 없던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 헝가리에서 악기사를 운영고 계셨고, 그 분을 통해 악기제작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20대 초반 인생의 갈림길에서 큰 결정을 할 수 있게 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유로저널: 다소 평범하지 않은 전공이라 혹시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고종률: 제가 커오면서 부모님께 지겹도록 들은 소리가 있어요. “넌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냥 혼자 살아라!” (웃음)

유로저널: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텐데, 현악기 제작 및 수리를 공부하게 되면, 어떤 것들을 배우는지, 또 졸업 후에는 어떤 진로로 연결되는지요?

고종률: 보통 제 전공이 현악기 제작이라고 말씀 드리면 다들 신기하게 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물어보시는 분들께 그냥 목수라고 대답합니다. (웃음) 실제로 전직 목수였던 분들이 멋진 장인이 되신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거든요. 학교 입학을 원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입학은 학교생활과 졸업에 비해 대체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다닌 학교의 입학 이론시험은 IQ, EQ 테스트, 기본적인 철학과 음악이론 정도만 보았고, 실기시험은 그냥 톱질과 칼질(?)을 하는 능력을 볼 뿐이었죠. 이 분야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건 ‘끈기’ 라고 생각합니다. 제 선생님 또한 입학생의 실력보다는 얼마나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가를 보셨던 것 같더라고요. 그냥 손톱만한 전나무 조각 하나와 칼 한 자루를 주시고는 특이하게 생긴 구멍에 정확히 끼워 맞출 수 있는 모양을 만들어 내라고 하시더군요. 결국은 해내지 못했습니다만, 전 합격이었습니다. 화장실도 안가고 3,4시간을 한자리에서 계속 그 이상한(?) 모양만 만들고 있었거든요. 악기제작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은 각 나라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다닌 헝가리 악기제작 학교에선 현악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파이프오르간, 침벌론(Cimbalon, 헝가리 전통악기), 목관, 금관악기의 기본적인 제작과 수리, 그리고 음향학, 악기의 미학, 음악이론, 목 재료와 금속재료의 이해, 악기의 역사와 이해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전공하는 악기제작에 대한 연주실력도 있어야 했기에 악기연주 또한 기본적으로 배워야 했죠. 이 모든걸 3년 동안 학년별로 나누어서 배웠습니다만, 음향학과 악기의 미학은 3년 내내 배웠어야 했죠. 특히, 음향학은 물리를 매우 싫어했던 저에겐 정말 골치덩어리였습니다. 실기수업은 다른 여느 학교와는 달리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학생들은 입학 전 헝가리 각 도시에 분포되어 있는 악기사와 공방의 장인들에게 3년간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말 그대로 도제식 수업이었죠. 그 덕분에 3년간 사회생활까지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에선 학교 졸업 후 이렇게 밑에서 배운 장인과 함께 계속 공방을 함께 나가는 학생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하고 방황하는 친구들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300년 간의 악기시장과 거래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학교를 졸업하고 꼭 공방만을 차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악기 제작가가 있다면 그 악기를 감정할 수 있는 감정가가 필요하구요, 악기의 거래를 맡아 하는 전문딜러도 필요하고, 악기가 고장이 났거나 부서지면 수리를 맡는 수리사나 복원가 등 여러 역할이 필요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분야에서도 새로운 직종들이 계속 생겨나리라 봅니다.

유로저널: 헝가리에서 공부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헝가리는 어떻게 가게 되셨는지, 또 그곳에서 공부하는 과정은 어땠는지요?

고종률: 처음에는 솔직히 헝가리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웃음) 그냥 유럽에 한 나라겠거니 했던 저에게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군 복무 중 무작정 한국을 훌쩍 떠나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던 생각에 아버지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마침 제 여동생은 그때 체코 프라하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그 당시 동유럽의 큰 두 나라였던 헝가리와 체코를 추천해줬습니다. 인터넷과 서적을 뒤적거려 보니 헝가리는 비록 공산국가였지만 리스트, 바르톡, 코다이와 같은 멋진 음악인들이 태어난 음악의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아직은 생소한 느낌이 나는 나라들이라 어린 저에게 도전욕구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갓 제대한 군바리의 무대포 정신이라고 해 두죠. (웃음) 그렇다면 체코는 왜 가지 않았냐고요? 여동생과 싸울까 봐서요. (웃음) 합스부르크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왔기에 제가 갔을 당시의 헝가리에서는 영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독일어가 그들에게는 더 친숙했죠. 처음 의사소통도 안 되는 저에게 처음에 닥친 일은 헝가리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다 잃어버리게 된 거죠. 이 짐을 찾기 위한 고생이 저에게 첫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헝가리어 습득이었죠. 결국 그 짐은 다 찾지 못했지만 이것은 저에게 언어의 중요성뿐만 아닌 다른 많은 것들도 안겨다 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인이 몇 명 없기에, 특히 학생들은 더욱 드물기에 가깝게 뭉쳐 지냈던 친구나 형, 동생은 정말 소중했습니다. 특히 제가 학교를 입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 주신 분들이 생각나네요.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실기수업을 위해선 학생이 직접 공방을 찾아가 장인에게 허락서를 받아야 했는데, 아직도 인종차별이 잠재적으로 남아있는 헝가리에서 동양인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헝가리 전 지역을 다 돌아다녀 보면서 공방을 하나 하나 찾아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다 거절 당하고, 어떤 곳은 터무니 없는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죠. 이렇게 하마터면 헝가리에서 제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방황할뻔한 저를 꿋꿋이 도와 주셨던 형들이 있었어요. 특히 심00 형님. 감사합니다!

유로저널: 아무래도 악기를 다루는 일을 하시는 만큼, 음악을 좋아하시는지요? 또 직접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시는지요?

고종률:  네!! 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한 달에 적어도 한 두 번 정도는 South Bank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 갑니다. 그곳은 런던에서 제가 가지는 유일한 휴식처죠. 표 값은 학생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구요. 아직 음악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이지 않아 수박 겉햝기 식으로나마 듣고는 있지만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영향 덕인지 아직 음악회에서 졸아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웃음) 부모님께서 어릴 때부터 많은 음악을 들려주셔서 성인이 되어선 귀에 익숙한 곡들이 아주 많았죠. 악기를 접했던 기회도 적지 않았고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성악, 그리고 더블베이스도 아주 조금은 연주 가능합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공명통이라 불리는 인간의 몸을 이용한 성악과 그에 가장 흡사한 소리를 내는 첼로는 더 배우고 싶습니다.

유로저널: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훌륭한 악기의 조건은?

고종률: 한 마디로 말씀 드리자면 그 악기 연주자와 가장 어울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악기라고 생각합니다. 악기 연주자로선 이렇게 궁합이 맞는 악기를 찾기가 가장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악기의 가격이나 연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자신이 아주 좋은 악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해 보고 싶어 합니다. 악기 하나 하나가 사람 얼굴 생김새처럼 가지 각색이거든요. 악기, 즉 음악 기구라는 말 그대로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소리를 가장 우선시 여겨야 합니다. 악기의 모양이나 제작자, 제작연도, 제작장소 같은 것은 그 다음으로 생각되어야 할 사항들이죠. 가장 좋은 악기를 찾는 데에는 이 모든 조건들을 다 충족시켜야 하기에, 보통 악기를 돈으로 값어치를 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악기시장은 상품에 정가가 없죠. 악기 경매장에서도 악기 추정가격만 나와 있습니다.

유로저널: 서양 현악기를 다루시는 만큼, 동양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고종률: 누군가 그러더군요, “한국은 바이올린과 피아노 왕국이다.”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이나 바이올린 학원을 한번씩 다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죠. ‘남자아이는 태권도장, 여자아이는 피아노학원’,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웃음) 오히려 한국 전통악기들이 한국인들에게 더 생소하게 여겨질 정도죠. 부끄러운 현실입니다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덕분에 서양 현악기에 다가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의외로 현재 세계 각국의 악기제작학교에서 공부하는 한국인들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젓가락질에 익숙한 우리의 손재주와 서양악기 문화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배경 덕에 한국인의 실력은 높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로저널: 이 일을 하시면서 가장 즐거울 때,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고종률: 과거의 제 꿈은 멋진 첼로 연주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첼로활 대신 끌과 대패를 손에 쥐고 있죠. 그래도 지금도 전 제 과거의 꿈의 연장선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제 손을 거쳐 멋진 연주가 이루어 지기 때문이죠. 그 연주자의 성공이 곧 저의 보람입니다. 제가 학생 초창기 때였어요. 갑자기 선생님이 출장을 가시게 되어서 혼자 공방을 보고 있어야 했었죠. 어떤 학생이 급히 공방을 찾아와서 내일 연주 시험이 있는데 악기 소리가 잘 나지 않더랍니다. 선생님이 오실 때까진 기다릴 수 없고 어떻게든 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제가 그 동안 배운 것을 총 동원해서 수리를 했는데, 수리비가 얼마냐는 질문에 난감했습니다. 수리비 계산은 항상 선생님께서 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연락조차 되지 않으셨거든요. 그냥 2000 Ft (약12,000원) 정도로 불렀죠. 나중에 선생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20000Ft (120,000원) 은 족히 받아야 하는 수리라고 웃으시면서 그 돈을 저에게 주시더라고요. 다음날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어요. 활짝 웃으면서 덕분에 시험을 성공적으로 쳤다며 저와 선생님에게 초콜릿과 편지를 주고 갔습니다.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지더군요.

유로저널: 영국에는 어떤 계기로 오게 되셨으며, 현재 영국에서 하고 계시는 일은?

고종률: 영국은 세계 최초로 경매장이 생겨난 곳입니다. 역사가 가장 오래 된 만큼 경매 품목들도 참 다양하죠. 악기경매장에서 일을 해 보고 싶더라고요. 그러기 위해선 영어가 완벽해져야 하고 더 많은 공부와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지금은 영어연수를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고 있고요. 시간이 날 때마다 런던에 악기사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헝가리에 있는 현악기장인 친구와 동업으로 악기를 런던에 판매하고 있고요. 한번은 스트라드를 연주한다는 한 분을 만났는데 저희 악기를 선뜻 연주해 주시더니 소리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해 주시더라고요. 여기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금 Tottenham Court Road 쪽에 있는 악기사에 저희 악기가 하나 올라가 있어요. 쇼윈도에 걸려 있는 저희 악기를 볼 때 마다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비록 아직은 Yes 보다는 No를 들을 때가 많지만 영국에 위치한 악기사를 다 돌아다니기 전까진 영국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유로저널: 일반인들은 종종 고가 현악기들의 가격에 놀라곤 합니다. 전문가로서 고가 현악기의 가격이 책정되는 과정을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종률: 현악기의 가격, 특히나 올드 악기의 가격을 측정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악기의 소리와 보존상태, 수집가나 그 악기를 연주했었던 연주가에 의해서 가격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악기가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기록도 악기의 가격을 만드는데 작용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악기에 관한 에피소드 등의 역사적 기록까지 있다면 악기의 가격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기도 하죠. 현악기의 수명은 약 350년 정도의 선이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악기는350년간 진화하다 그 이후 퇴화하게 되죠. 우리가 잘 아는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와 같은 16, 17세기 장인들의 몇 안 되는 악기들이 빛을 내며 연주를 해 줄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런 한정된 명기들에 대한 수명 덕분에 우리들은 신문이나 잡지 또는 인터넷에서 악기 하나에 엄청난 가격이 붙는걸 보게 된거죠.

유로저널: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꿈은?

고종률: 저에겐 꿈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장의 현악기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시아에 악기 도구회사를 만드는 것이고, 세 번째는 비밀입니다. 앞에 두 가지 꿈을 이루기 전까진 제 마음속에 품어둘 생각이거든요. 이곳 영국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이름과 제 악기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로저널: 오늘 너무나 흥미로운 얘기 들려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고종률 님의 멋진 꿈들이 꼭 이루어지도록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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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전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