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가장 1차적인 의무는 국부의 축적이나 국격의 상승이 아니라 국민의 신체적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다. 외침, 자연재해,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최우선 과제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인재건 천재건 어떤 형태이든지 인명을 대량 희생시키는 사고는 모두 국가시스템의 책임이다. 2011년 한 해에 교통사고, 화재, 산업재해 등 3대 재해로 32조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로 인한 연평균 사망자도 7495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즉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죽음이다.
지난 9월 27일 경상북도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는 독성 화학물질인 불산(불화수소산)가스 누출사고가 있었다. 사고 당일 현장에서 5명이 죽고 18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상자가 수천명으로 늘어나고 농축산물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정부는 사고 발생 열하루 만인 지난 8일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당국은 사고가 나자 일단 주민들을 대피시켰으나 12시간 후 안전에 이상이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결국 주민들이 집단 검진을 받고 다시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판단했다가 화를 키운 꼴이다.
문제는 사고가 난지 10일이 넘었는데도 정부차원의 딱 떨어지는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이 점을 무척이나 분개하고 있다는 보도다. 구미시장은 주민들이 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비판하자 공무원을 비판하지 말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대책이 나오질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발생 10일 만에 현장을 찾은 유영숙 환경부 장관은 대책본부, 마을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웃으면서 관계자와 주민들에게 명암을 돌리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환경장관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데 굳이 명함을 돌릴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한 주민이 선거운동 하러 왔느냐며 소리를 치는 일까지 생겼다.
정부는 부랴부랴 관련 부서 합동 대책회의를 열고 구미 봉산리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하는 등 사고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고 한다. 당연한 조치이지만 그동안 너무나도 굼떴고 무능력했다. 특별재난지역 지정은 물론이고 무릇 재난 대응이란 신속하게 진행해야 피해를 최소화하고 복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불산 누출 사고가 일어난 지 열하루가 지나서야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체계적 대응에 나섰다. 정부가 허둥대는 동안 사고지역 인근 주민들은 건강과 생활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누출된 불산이 주위에 퍼져 농작물ㆍ가축ㆍ토양ㆍ지하수ㆍ강물을 오염시켜 야기되는 '3차 피해'의 가능성도 그만큼 더 커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유독성 물질의 관리와 관련 사고대응 체계가 허술한 데 있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인 구미시는 물론이고 정부도 사고발생 후 거의 열흘 동안이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휴브글로벌 공장에서 5명이 숨지는 대규모 독성물질 누출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정확한 진단은 물론 신속한 초기 대응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소방관들은 처음에 방독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투입돼 불산 중독 증상을 일으켰다. 불산 중화제인 석회를 구하는 데만 하루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마을 이장이 기껏 대피시켜 놓은 주민들을 구미시가 '별일 없다'며 복귀시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주민들이 2일부터 '마을을 떠나야 하는지 여부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수질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말만 여러 날 되풀이했다.
불산은 인체에 스며들면 살과 뼈를 녹아내리게 하는 치명적 독성을 지닌 화학물질이다. 이런 위험 물질에 대한 관리와 사고대응이 이토록 허술하다면 우리는 각종 유독성 화학물질의 위험에 상시로 노출돼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정부의 으뜸가는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일이다. 정부 합동 대책회의를 계기로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하고, 부실ㆍ늑장 대응 책임자에 대한 문책이 엄정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총체적 문제가 드러난 재난대응 체계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