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단일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23일 밤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야말로 ‘전격적’이었다. 전날 오후부터 종적을 감췄던 안 전 후보는 이날 밤 8시20분경 캠프 4층에 있는 기자실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몹시 굳어 있었고, 또 무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안 캠프 취재기자들은 안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담판’을 제안할 줄로 예상했다고 한다. 당일 낮 양측 특사간의 담판이 깨지자 여론조사는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두 후보 간의 ‘최후의 담판’ 뿐이었다.
그런데 마이크 앞에 선 안 후보의 첫 마디는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저는 오늘 정권교체를 위해서 백의종군을 선언합니다”였다. 몇몇 핵심을 제외하고는 안 캠프의 사람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A4용지 3분의 2 분량의 길지 않은 사퇴선언문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안 후보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때론 입술이 가볍게 떨리기도 했다.
특히 말미에 가서는 격한 감정 때문인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캠프 동료,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대목에서는 울먹이기도 했다. 5분여에 걸친 그의 사퇴 기자회견은 처절한 풍경이었다.
지난 9월 출마선언을 한 이래 60여일은 숨 가쁜 일정이었다. 박선숙 선대본부장을 제외하면 캠프 내에 선거를 치러본 사람이 없었다. 안 후보로서도 힘들고 낯선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 기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새 정치를 갈망하는 지지자들의 열망뿐이었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처음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민 후 겨우 1년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그는 한국정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그는 집권여당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대세론’을 잠재웠고, ‘노사모’ 만큼이나 강렬한 정치현상으로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선가도를 완주하지 못하고 중도하차 하고 말았다. ‘야권 단일화’라는 벽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그는 정권교체를 통한 새정치 실현을 모토로 내걸었다.
그런 그에게 경쟁자가 한 사람 있었다. 제 1야당의 문재인 후보였다. 박근혜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야권후보 단일화가 절대명제였고, 안 후보 역시 이를 수긍했다. 그래서 둘 간에 단일화 협상이 진행됐다. 그러나 협상은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았다. 어느 쪽도 쉽게 양보하기 어려운 사안이라고 쳐도 진도는커녕 갈등만 키운 꼴이 됐다.
물론 매끄럽지 못했던 단일화 협상은 어느 한 쪽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문재인 후보가 낡은 기득권을 앞세웠다면 안철수 전 후보는 그를 타파하기는커녕 너무 겁을 집어먹었다. 문 후보가 ‘큰형님’ 이름값을 못했다면 안 전 후보는 ‘참신한 동생’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둘 모두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절호의 기회였던 21일 밤 ‘TV토론’조차 흥행에 실패했다. 결국 ‘아름다운 단일화’는 물론이요, ‘아름다운 경쟁’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단일후보’가 된 문재인은 물론 사퇴한 안철수에게도 마이너스가 됐다고 본다.
최악은 안철수의 ‘일방적 사퇴선언’이었다. 단일화를 열망했던 사람들은 안 후보가 너무 ‘감정적’이었다고 말들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감정이 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마무리를 그런 식으로 처리한 건 너무 서툴렀다는 얘기다.
사퇴선언문에서 “이제 단일후보는 문재인 후보입니다. 문재인 후보께는 성원을 보내주십시오”라고 했지만 이를 ‘문재인 지지’라고 보기 어렵다. 이보다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내용이 훨씬 더 많다.
사퇴 선언 이튿날 안 전 후보는 지방 모처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평소 악기(惡氣)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그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속엔 서운함, 억울함, 분함, 아쉬움 같은 게 가득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그에겐 심신의 휴식이 절실하다.
그렇다고 쳐도 그리 오래 끌 일은 아니다. 문 후보를 돕는 건 둘째 문제다.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치고 이제는 털고 일어나야 한다. 그는 이미 ‘타고 온 배를 불살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