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국인 사회학자이며 대학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한국을 가르켜서 "사람을 죽이는 사회"라고 지적하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그도 그럴것이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러한 지적을 받을만도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짚고 넘어가 볼만한 일이다.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신자유주의의 심화와 함께하는 보통사람들의 생계의 불안 때문인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되는 30대. 또는 갑작스런 부도로 인한 비관자살 등이 자살하는 이유 중의 1위를 차지한단다.1997년의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여파로 그당시 자살자 수는 평소의 두배로 증가하여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자살공화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상기한 두가지 요인도 꼭 맞는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생계문제나 정치성을 띈 외부와의 관계나 자국의 구조조정 등의 새로운 변화를 맞는 다른 중진국들 (우리나라보다 더 힘든상황에 처한)도 얼마든지 있다. 필자는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나 자신이 한국인이기에 나의 경험으로 인한 상황설명은 할 수 있다.
생계문제라던가 사회 문화적 요인도 자살심리를 부추기는데 한 몫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또 따로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들어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단단히 내면화 되어 있는 자본 제일주의 개념과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가장이라든가 회사의 대표자 등등--) 강력한 책임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회의 특징?
가족간의 온전한 성숙한 사랑의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우수한 성적을 못받아서 명문대에 갈 수 없으니 나는 효자 또는 효녀가 될 수 없다는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이러한 사고도 일종의 가정이라는 우리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집단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볼 수 있다) "성적 비관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책임에 수반되는 "책임의 윤리"윤리도 우리는 가르쳐야 되지 않을까? 한마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사랑의 실종"시대인 것 같다.
학생이라면 학과성적도 중요하지만 학생이기 전에 가족구성원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책임의식은 사랑을 바탕으로 주어진 몸과 마음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아니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것이야 말로 더욱 큰 불효인 것이며 사업 실패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죽음으로 대신한다는 것은 더욱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필자 또한 사람을 죽이는 우리사회에서 반이상은 죽은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역시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이 우리의 인생을 죽쓰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니! 종종이 아니라 자주 있다고 봐야겠다. 타를 위하여 자기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배웠는데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이기적인 소유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베일을 쓰고 나타난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자녀교육에 대한 투자를 하여 나중에 찾아올 성공의 보상에 대한 공동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아이를 잔인할 정도로 입시지옥에 몰아 넣고 부모의 소유욕을 성취하려는 부모를 바라보는 자녀들이 과연 그 부모를 향해 진실된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불안, 공포 등등의 감정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은 마침내 살인적 심리의 발상으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더러는 본인의 목숨을 끊는 일들이 자주 있다.
학교는 학교가 아닌 입시학원으로 변하여 등록금을 약탈하고 시간강사나 청소원 등과 같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노동을 악질적으로 착취하는 현상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신성한 노동이 착취의 현장에서 어찌 신성할 수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사랑이 불가능한 곳이 지옥이라면 지금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다. 지옥에 있는 생명들이 지옥을 벗어날 궁리를 하다가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지옥을 벗어나 또 다른 지옥으로 가는 걸까? 여기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종교계 지도자들 마져도 간혹은 새로운 시대의 변모된 면죄부를 매매하는 듯한 행위를 한다.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벗어나 성공할 수 있는 주술적 방식으로 신의 전에 투자(?)를 강요하며 본인들이 신의 자리를 대리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
필자도 자살을 해도 천번만번할 기회가 주어졌다. 심지어 나랑은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 또는 나한테 조금이지만 도움을 받았던 사람 그들이 유언비어 또는 적반하장으로 떠들어 대는 심심풀이 말장난에 더 웃기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의 그 소음에 가까운 말이아닌 소리만을 듣고 (말은 소리와 다르다. 말은 진실 또는 사실을 담은 것이라야 말이다) 삐에로 처럼 떠들어댄다.
그럼 왜? 자살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 무성한 유언비어 속에서 존재하는가? 그것은 나는 개가 아닌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다. 어떤 현인은 자신의 참된 스승은 한마리의 개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날 물가에 누어서 기진맥진항고 목마른 개를 한마리 보며 느낀바가 있었다.
왜 그 개는 물가에 앉아서 그토록 목말라 하는가,그 개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놀라서 뒤로 물러서곤 하였다. 왜냐하면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른 개로 착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너무 목이말라 죽기를 각오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다른개는 사라져 버렸다. 그 개에게 장애물은 자기자신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낸 것이다. 자기자신이 구하고 있는 것과 자기자신과의 사이의 장벽을 발견하는 순간 장애물은 녹아 없어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나의 장애물도 사라져 가고 있다. 내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예를 들자면 자존심, 이기심, 지나친 승부욕 등등---) 이 바로 장애라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수 있다. 참된 것을 찾고 나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자 할 때 장애물은 그져 제거할 대상이지 귀한 생명을 끊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이 엉망진창 불의와 헛소문으로 가득하여 목울 조여온다거나 괜한 경쟁심리로 앞길을 방해하기에 걱정스럽고 때로는 무척이나 불편하다. 모든 자살 예정자들이여 기억하라. 이세상 그 누구도 그 죽음의 절망에서 자신을 구해낼 수는 없다. 주변사람들은 늘 우리를 칼이나 총이 아닌 그 시금 털털한 혀, 그들 자신마져도 물가에서 목말라하는 한마리의 개처럼 자신들의 문제도 해결치 못하면서 그 초라하고 비열하고 더럽기까지한 그 혓바닥으로 우리의 숨통이 터지도록 미친 헛소리들을 지껄여 대고 가끔씩은 간신배 같은 가자미 눈으로 우리를 흘켜보며 마치 죽일기세를 보이기도 한다 더럽다 그래도 자살하지 말라. 참고 견디노라면 어느날 그들이 먼저 간다 .
생의 참된 길도 모르는 주제들이 뱀처럼 넘실거리는 혀로 더이상은 우리를 씹을 수 없는 그날이 오면 마침내 자살하지 않았음이 즐거울 날이 올것이다. 궁극적으로 끓여도 끓여도 녹지 않고 건데기로 남아있는 자기자신(자아)이 문제임을 발견하라.
우리들의 생명은 존귀하다고 외치는 진실의 초청앞에 저들이 굴복하고야 말것이니까.
김 혜 성
사회복지법인 한국청소년봉사회 전 대표이사
한국유아교육 연합회 교수
국제 청년문화원 상임이사 (International Youngmen's Cultural Centre)
유로저널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