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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신에세이
2008.12.08 00:15

싸움의 중재자 (12월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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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신(영국, Glasgow거주)

학교 다닐 적 어찌어찌하다보니 내 별명이 ‘황희 정승’이라고 붙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종종 일어나는 두 친구의 말다툼 뒤에 이사람도 날 불러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내게 하소연하고 그 일이 끝나서 도서관 내 자리로 되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한쪽도 나를 불러서 자기의 안타까운 사정을 하소연하고, 내가 한 일은 별 건 없었고 단지 친구들의 얘기만 귀 기울여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내게 자기 얘기를 하고 한껏 화났던 마음이 풀려서 돌아가는 친구들, 나는 두사람을 더 부추겨서 싸움을 더 크게 만들지도 않았고, 나라도 네 입장이라면 그렇게 속이 상했을 것같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니까 마음을 풀어, 곧 괜찮아질꺼야, 하면서 속상한 친구 옆에 같이 있어 주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 친구들이 나를 황희정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불난 집에는 절대 부채질을 하면 안된다.  남 못되는 걸 즐기려는 놀부 심보가 아니고서는 또한 그럴 수도 없다.
내 이런 전적(?)이 한번은 국제적으로 빛을 발한 적이 있었다.  밴쿠버의 UBC 어학 프로그램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작문을 배우는 과목이었는데, 종종 그룹토의를 거쳐 설득력있는 글을 쓰는 요령을 훈련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매너리즘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자주 그룹 구성원들을 바꿔서 배치하곤 하였는데, 문제의 그날 나와 함께 원탁에 앉게된 문제의 그 두 학생중(여럿이 있었지만 그 주인공들만 생각난다)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온 호방한 남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멀고도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 온 조신한 여학생이었다.  
그날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너무 오랜 일이라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룹토의가 시작되고 얼마 있지않아 문제의 그 남학생에게 발언권이 돌아가고나서 처음은 그런대로 경청할 만했다.  어학프로그램에서는 잘 듣는 것도 좋은 공부다.  그런데 그의 말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도 사실은 속으로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하였다.   내 옆의 아주 학구열이 높은 일본 여학생(그냥 미치코라고 하자) 미치코는 하마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끝나지않는 길고 긴 발언에 화가 난 미치코의 얼굴은 점점 빨개지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붉으락푸르락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아슬아슬해보였다.  그 분위기도 미치코의 상태도 뭔가 급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무도 손을 쓸 기미를 보이지않자, 내가 그 남학생에게 정면돌파를 했다.  
“이봐, 이 친구야, 대체 언제 네 말을 끝낼거야?  미치코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잖아.”
그랬더니 그 남학생은 머쓱해졌는지 그러면 자기가 말하는 중간에라도 말을 가로채서 발언을 할 것이지 왜 이제까지 기다렸냐고 되묻는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중간에 방해를 하면 실례가 되니까 그렇지, 너도 너 혼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기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 입장도 고려해야 되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을 전했던 것같다.  자기네 나라 이태리에서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중간에 말을 끊고 대화를 시작해도 아무런 결례가 되지않는다고 설명하던 그 남학생, 조신한 그러나 매우 학구열에 불탔던 일본 여학생과 하마터면 크게 싸움이 날 뻔한 아슬아슬 긴장감 넘치는 날이었다.  그로 인해 그날은 어떻게 수업이 끝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그 과목 담당 선생님이 내 곁에 오더니, 어제는 네게 정말 감사했다,고 인사했다.  왜냐고 묻듯이 눈이 동그레진 나에게 선생님은 네가 어제 두사람간에 일어날 뻔한 싸움을 말렸지 않았냐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던 것을 네가 평화롭게 중재해줘서 정말 고맙다면서 연신 내게 치하를 표했다.  두 강대국간의 싸움을 조정해서 또 다른 강대국 대표(참고로 선생님은 캐나다인이었다)에게 치하를 받은 한국대표,  그럼 누가 진짜 초강대국이 되는 셈인가?  국위선양하는 길도 참 여러가지다.
그 일이 있고나서 나는 그 이태리 남학생으로부터 언제가 이태리 로마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지 그리고 어디를 보러 가야 되는지 등등의 지금은 다 까먹은 정보들을 좀 얻어들었는데, 그 덕분에 내 타이완 친구 펠리(Peili)는 내가 그 장발에 구렛나루 수염까지 기른 그 친구랑 사귀는 줄로 한동안 오해했다고 실토해서 한참 웃은 적이 있었다.
에이, 그때 누가 이기나 한번 싸움을 시켜볼 걸 그랬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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