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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영국 생활 9년 차에 접어든 요즘, 비록 보잘 것 없는 유학생으로 영국에 첫 발을 내딛였지만, 그럼에도 8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영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아온 만큼, 이제는 감사하게도 분에 넘치게 좋은 기회들이 찾아오곤 한다.

너무나 멋진 경험을 하게 되고, 훌륭한 분들을 만나게 되고, 화려한 장소에 가게 되고, 비싼 식사를 대접 받게 되고...

뭐 원래부터 그런 것들을 누려왔던 분들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태생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로서는 마치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서 겪는 것과 비슷한 심정인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것들, 화려한 것들을 접할수록 사람들은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을 갈망하게 된다는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그렇게 좋은 것들, 화려한 것들이 신기하고, 즐겁고, 또 감사하면서도,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오히려 두렵기도 하고 자꾸 내가 처음 떠나왔던 곳이 더욱 그리워지곤 한다.

훌륭한 분들을 만나고, 화려한 자리에서 좋은 식사를 대접받는 것도 좋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에 아버지와 주고받던 소주잔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분들을 만나도 부모님에 비할 바가 아니고, 아무리 화려한 자리일 지언정 어머니가 차려주신 식탁에 비할 바가 아니며, 아무리 즐거운 시간일 지언정 아버지와 소주잔을 주고받는 그 순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영국에서, 또 유럽에서 가졌던 그 좋은 경험들, 그 멋진 순간들에 부모님이 함께 했더라면 그나마 위안이 될텐데, 그 벅찬 것들을 내 가슴에만 꾹꾹 눌러 담아 두려니 때로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좋은 기회를 누리고, 때로는 화려한 박수 갈채와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를 받기도 하고, 그야말로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멋진 경험들을 하게 되지만, 문득 그런 것들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러한 것들을 내가 잘 감당할 수 있을 지, 또 그러다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내가 속물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 잘난 사람이 되어서 더 좋은 것을 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떠나온 그 소박하고 어리숙했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면 유독 어린 시절 살던 동네, 청소년 시절과 20대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곳을 애써 찾아 다니는 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나는 영국에서조차 초창기 유학 시절 지냈던 동네, 당시에 주로 이용했던 저렴한 식당을 지금도 종종 찾곤 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잊고 지냈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고, 또 지금 현재의 나의 모습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정말 분에 넘치게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만큼, 내가 처음 떠나왔던 곳, 내가 거쳐왔던 곳을 다시 되돌아보며 초심을 잃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또 더욱 감사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회귀 본능일 수도 있고, 또 더 이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피터팬과 같은 마음일 수도 있다.

멀리 떠나올 수록, 높이 날아오를 수록 원래 내가 떠나왔던 자리, 원래 내가 있었던 그 낮은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어른이 될수록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은 그런 마음...

내가 가장 편안하고, 내가 가장 행복했던 자리, 그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그런 심정...

아마도 부모님 앞에서는 그렇게 어린이가 될 수 있고, 그렇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에 나는 좋고 화려한 것을 경험할수록 부모님을 떠올리며 내가 떠나온 자리가 그리워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좋고 화려한 것을 경험할 때면 나는 최대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나의 빈틈을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내지는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적어도 그런 격식이나 의무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도 그렇게 나의 회귀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나 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회귀 본능을 간직한 채, 그렇게 순간 순간마다 자꾸만 자신이 떠나온 곳, 지나왔던 곳을 뒤돌아보고, 그리워하며, 돌아가고픈 심정을 억누르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실제로 그렇게 회귀한다면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것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은 더 멀리 다니며, 더 높이 다니며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워야 할 시간인데, 때로는 어려움도 겪어보고, 때로는 원치 않는 일들도 만나면서, 더 강해지고 더 성숙해져야 하는 시간인데, 부지런히 가던 길을 멈추고 그저 그리운 것을 찾아,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를 찾아 돌아간다면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할 것만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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