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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1 02:45
‘행복의 나라’에 살고 있는 올드보이 (1)
조회 수 3196 추천 수 0 댓글 0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 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를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벽에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봐요 귀도 또 기울여요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없이 고개 들고 들어요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 한대수 작사/작곡 ‘행복의 나라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한민국 가요계를 뒤흔들고 있었던 중학교 시절 나는 오히려 거꾸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음악을 찾아듣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에 양희은의 대표곡들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구입해서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었는데, 그 중 유독 노랫말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곡이 있었으니, 바로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였다. 그 시절 포크음악의 대부분이 사랑 노래였음에 비해 ‘행복의 나라로’는 그 소재와 주제, 그리고 지향점이 전혀 색다른 노래였다. 감수성 예민한 10대 소년이었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며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한 어떤 자유인의 가벼운 날개짓을 느꼈고, 그야말로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는 아직 내 생애 첫 통기타를 구입하기 전이었고, 나는 이 노래의 원작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양희은이 부른 노래로만 이 노래를 간직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대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한대수의 자서전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해서 읽게 되면서 비로소 이 노래의 원작자를 만나게 되었다. 1948년생인 한대수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한국 최초이자 마지막 히피’, ‘기인’ 등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는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정말 흥미로운 인물이다. 한대수의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분으로 연세대학교 신학대 초대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분이고, 아버지는 서울대 공대 출신의 핵물리학자로 역시 한대수가 어린 시절 미국에 건너가 한 동안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집안 배경만 보면 정말 그 시대 최고의 엘리드 명문가 출신인 셈이다. 더구나 그는 집안에서 귀하디 귀한 장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은 오히려 그에게 가혹한 운명을 선사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부재 속에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조부모 아래서 성장했고, 그는 끊임없는 혼란과 극도의 고독을 경험하게 된다. 훗날 그는 자신이 그토록 외롭지 않았더라면 음악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할 만큼, 그가 경험한 극도의 고독은 예술로 표출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보석 같은 음악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마냥 자유롭게, 놀기만 하면서 살았을 법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수의학과에 입학할 만큼 영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물의 출산을 목격하면서 그는 수의학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전공을 사진으로 바꾼다. 엘리트 집안 출신 답게 그는 공부도 잘 했지만, 그러면서도 피아니트스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감각도 출중했던 그는 사진으로도 꽤 인정을 받았을 만큼 그야말로 다재다능했다. 훗날 그는 대한민국 국전 사진 부문에서 입선하면서 3급 공무원에 준하는 직장 생활도 했고, 신문사 기자로도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대수라는 이름 세 글자를 세상에 알린 것은 그의 음악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유행하는 대중 문화나 히피 문화를 직접 체험한 한국인이 드물었고,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던 1968년 한국에서 가수로서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파격이었을 것이다. 치렁 치렁한 장발에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불었고(이렇게 통기타와 하모니카 동시 연주를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인 게 바로 한대수),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세시봉 가수들이 달달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던 것에 비해 한대수는 걸쭉하고 거친 음성으로 노래했으며,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를 불렀다. 즉,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로서도 그는 한국 최초였다. 게다가 그의 노래는 동시대 가수들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시봉 가수들이 주로 번안곡이나 달달한 사랑노래를 불렀던 것에 비해, 한대수의 노래에는 철학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포크송’하면 마치 레크레이션이나 캠프파이어에서 다 같이 부르는 낭만적인 노래 정도로 이해되지만, 미국의 포크송은 시대를 반영했고 ‘저항’, ‘반전’과 같은 철학이 담겨 있었으니, 한대수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진짜 포크송을 만들고 부른 가수였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은 그렇게 혜성처럼 나타난 한국 토종 히피의 등장이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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