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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이야기
2014.04.28 19:17
프랑스 음식 음료 문화 (4)
조회 수 16319 추천 수 0 댓글 0
프랑스 음식 음료 문화 (4) 공화국과 왕정 황실의 식탁2
1870년-71년 겨울 프러시아 전쟁으로 빠리 함락 당시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매너 없이 개나 고양이 쥐들까지 먹어야 했다. 마요네즈 소스에 고양이 고기 저민 요리 나 쥐고기 곁들인 개 다리 요리를 레스토랑 메뉴판에 올려 놓았다.
1870년 겨울 쥐와 고양이 요리가 들어 있는 메뉴판
이 비극적인 시간은 있었지만 19세기는 식도락의 세기였으며 훌륭한 요리사가 배출되었고 제 2제정과 제3공화국은 요리 축제와 멋진 레스토랑으로 넘쳐 났다. 특히 요리의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조흐쥐 오귀스트 에스꼬피에(George-Auguste Escoffier)는 〈프랑스 요리 가이드〉(le Guide Culinaire)을 만들었다. <에스코피에 요리 명장> 이 전설적인 명장은 지금도 유명한 뻬쉬 멜바(pêche melba)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내었고, 런던의 사보이 호텔, 더구나 “그의 요리로 인하여 오늘날의 릿츠 호텔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스위스 호텔 업자 세자르 릿츠의 말을 떠올리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요리사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원가 개념이 레스토랑의 중요한 항목으로 자리 잡은 이상 그의 요리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고급 요리의 전설로 남게 된다.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람들은 축제 시기가 되어야 고기를 섭취할 수 있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농업 생산의 발달로 모든 사람들이 육식을 할 수 있게 되자 이제는 과식이나 과잉섭취가 문제가 되었다. 프랑스 요리는 건강식으로 전환되어 음식 섭취량을 줄이고, 식재료의 질감, 색상, 식기와의 조화로운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뽈 보큐즈Paul Bocuse,미쉘 게랑 Michel Guérand 등의 요리사는 다이어트 요리법의
선구자들로 불린다. 전부는 아니지만 프랑스에서는 1900년부터 ‘미쉴렝
식당 안내 책자’(Guide
Michelin)에서 전국의 유명 식당들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별을 달아 주는데 최고급 레스토랑의 경우 별을 세 개를 준다. 2014년 현재 파리의 미쉴렝
3성 레스토랑은 27개가 있으며, 2성급
87개, 1성급 487개가 있다. 프랑스 식당의 종류 ("음식의 재료가 좋고 요리사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고객의 취향을
모르면 좋은 음식점이 아니다") 하지만 고객의 취향이 고약하면 주방장은 당황하여 고객을 바꾸려고 하던지 아니면 앞 치마와 모자를 벗어 두고 주방을 떠나게 된다. 레스토랑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16세기 처음 나타나는데 당시에는 공공 장소가 아니라 이는 음식으로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영양이 담뿍 들어 있는 야채와 향초가 곁들여 끓여 낸 소고기 곰국인 꽁소메와 같은 음식을 말한다. 동시에 레스토랑은 먹고 마시면서 자기의 체력을 회복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입맛을 즐기는 곳이 아닌 건강 회복의 장소다. 18세기 말까지 프랑스에서는 각 직업 조합이 있어서 엄격하게 사업 영역을 제한하고 그 경계를 명확히 하고 있었다. 오베르쥐(Auberge)는 주로 여행객들이 이용하며 사람과 짐승이 먹거리를 제공 받았다. 좋은 오베르쥐는 그 명단이 돌아 다녀 여행객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검은 빵에 맛이 간 포도주를 제공하는 형편 없는 오베르쥐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가지 요리만 공동의 테이블에서 제공받고 좋은 곳에서는 바다 가재나 송아지 요리를 제공하는 곳도 있었다.
<카바레 라뺑 아쥘 > 타베르니에(Tavernier) 카바레(Cabaret)겡게트(Guinguettes)에 가면 포도주ㅡ맥주,오드비,사과주등 알코올 음료를 제공 받는다. 이 곳은 오베르쥐나 트레뙤르에서 가져온 음식이나 간단한 것을 직접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 곳에서 소고기 국이나 곱창요리 등 내장 요리등 거친 음식에 싸구려 백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 카바레에서는 주로 빵과 포도주 그리고 오믈렛이나 후라이 된 계란을 먹을 수 있었다. 카바레는 가장 미제라블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1790년 에티엔 쉬발리에의 기록에 따르면 카바레에서 마시는 술로 가장 가난한 자들이 영양을 찾고 몸을 덥혔다. 빠리에서는 주로 시의 경계 세금을 내지 않는 곳에서 카바레는 문을 열었고 17-18세기 프랑스 왕국내에 카바레는 10만개 정도 영업을 했다고 한다. 트레뙤르(Traiteur)에 가면 소스와 수프를 그리고 전체적인 음식을 제공한다.
식도락 레스토랑의 탄생 라루스 식도락 사전에는 루이15세왕 치하 1765년 불랑줴가 자기 간판에 신성한 영양식(restaurants divins) 가게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한다. 그는 이 직업 조합의 경계를 깬다. 그리고 자기 고객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고 가격을 낮추고 레스토랑(Restaurant) 앞에 메뉴판과 가격을 걸어 놓았다. 트레뙤르들은 조합의 이름으로 불랑줴에게 소송을 걸었지만 이 소송은 패하고 레스토랑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레스토랑은 1782년 리쉴리외 거리에 보빌리에가 26번지 리쉴리에 가에 문을 연 “런던 타베르느”(grande tavern de Londres) 였다. 이 곳에서 손님들은 베르싸이 왕궁에서처럼 먹었고 런던에서처럼 병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영국과의 관계는 소원하지만 당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피난처로 사용되던 런던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는 계층에게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이 타베르느(Taverne)에서는 요즈음처럼 테이블을 개인적으로 서비스하며 시간을 정해 놓고 손님을 받았다. 1789년 혁명은 망명 떠난 귀족들의 저택에서 주방을 담당하던 요리사들을 실업에 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이 요리사들은 레스토랑을 열어 프랑스 귀족들의 요리를 더 연구 개발하여 시민들을 상대로 귀족적인 요리를 제공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프랑스의 수도 빠리는 식도락의 도시의 반열에 확실히 올라 가게 된다. 레스토랑은 특별한 경제 능력도 없는 지방의 의원들이 다양한 음식을 사먹어 가며 모여
혁명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좋은 장소였다. 먹으면서 마시면서 하는
일은 무엇이나 형통하게 된다. <Restaurant les quatre saisons>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빨레
르와얄 주변에 귀족 사회를 위한 100여개의 레스토랑이 있었다면
혁명 30년 후에는 3000개의 레스토랑이 문을 열고 있었다. <다음회에 계속>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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