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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30 18:58
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2) 석탄과 철강에서 경제, 단일시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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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 유로저널 536호 (2005년 9월2일) 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2) 지난 첫회에는 경제,정치, 사회.문화 분야에서 통합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들며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2차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통합의 역사를 살펴보자. 독일문제와 경제공동체 (EEC): 1958년까지 올 해는 2차대전 종전 60주년이다. 독일이 항복한 5월10일과 일본이 항복한 8월15일, 영국에서는 큰 종전기념행사가 개최됐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유럽을 한 번 상상해보자.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 대부분의 도시가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의 잿더미로 변했다. 독일인들은 2차대전 종전 직후를 ‘제로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전쟁기간중 독일 점령하에 있었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해방시켰고 이어 점령군으로 행세했다. 전후 유럽의 질서를 짜는 문제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이 맡았다. 유럽대륙의 심장부에 위치한 독일의 처리문제는 갈등을 자아냈다. 전후 초기에는 두 강대국이 협력하는 듯 하더니 1948-1949년 베를린봉쇄를 계기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당시 베를린은 미국과 영국, 소련, 프랑스 등 전승 4개국이 일정 구역을 맡아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 소련은 베를린으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 연합국의 베를린 관리를 봉쇄하려 했다. 지도를 보면 베를린은 육지에 있는 하나의 섬같다. 육로를 차단당한 서방연합군은 수송기를 이용, 거의 1년간 베를린 시민들에게 식량과 의료품 등을 제공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많은 정치인들은 유럽에서도 소련의 침공이 임박한 것으로 우려했다. 따라서 2차대전을 일으켰고 종전후 동.서독으로 분단된 서독의 재무장 문제가 핵심으로 떠올랐다. 서독을 재무장하지 않고 소련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반대가 가장 컸다. 1870-1871년 보불전쟁, 1914-1918 1차대전, 1939-1945년 2차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패배했다. 특히 2차대전중에는 수도 프랑스가 4년간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스스로를 강대국이라 여기는 프랑스인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미국은 그러나 서독에서 민주화.탈나치화.지방분권화라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했다. 미국의 서독 재무장화를 끝끝내 반대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서독군 전체를 창설될 유럽군에 포함하는 방식으로 서독의 재무장을 제안했다. 물론 프랑스는 전체 군가운데 일부만을 이 유럽군에 보낼 계획이었다. 서독에서조차 ‘나는 군대가기 싫어’라는 구호를 내세운 재무장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서독재무장 문제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그리고 다른 서유럽국가에서도 핵심쟁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54년 프랑스 의회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당시 영국의 앤쏘니 이든 외무장관이 영국 육군 5만여명과 공군 1만여명을 서독에 주둔시킨다는 공약을 제시한 후, 서독은 1955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에 가입했고 재무장을 시작했다. 이에앞서 유럽통합의 첫 단추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가 1952년 설립됐다.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은 프랑스와 독일간에 석탄과 철강을 공동관리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두 자원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전략물자이다. 독일의 라인란트 지역에 풍부한 이 두 자원을 제3의 기구를 만들어 통제하면 전쟁을 예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3개국이 가입, 이 기구는 활동을 시작했다. 각 회원국의 석탄과 철강, 고철생산과 소비 등을 공동으로 관리했다. 이 분야에서의 협력을 하다보니 당연히 다른 경제정책도 조정할 필요가 생겼다. 예컨대 각 나라마다 세제와 임금이 다르다. 이럴경우 석탄이나 철강 생산에 경쟁력의 차이가 난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면 세제와 임금 분야에서 각 회원국간의 협의가 필요하다. 서독군이 나토에 가입한 해인 1955년부터ECSC 6개국은 통합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경제공동체 (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 설립을 협상, 1958년 출범시켰다. 석탄, 철강의 공동관리에서 얻어진 경험을 경제분야로 확대했다. 당연히 단일시장을 목표로 했다. 6개 회원국간에 관세를 없애고 비회원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에 대해 동일한 관세를 메긴다 (공동대외관세). 그리고 회원국간에 자본과 노동도 자유롭게 이동함을 목표로 했다. 지난 첫 회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단일시장을 목표로 하는 경제통합을 추진한 것이다. 드골과 유럽공동체의 위기: 1968년까지 경제공동체는 순조롭게 가동되어, 1966년 회원국간의 거래에서 관세가 없어졌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실현에는 많은 제한이 남아 있었다. 당시 경제공동체 6개 회원국은 연평균 5%정도의 고성장을 구가하며 높은 복지수준을 누렸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프랑스에서 드골이 취임하면서 EEC는 몇차례 위기를 맞게된다. 드골은 1958년 알제리 전쟁의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약속을 내세우고 5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강력한 대통령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했다. 그의 외교정책의 목표는 위대한 프랑스 재건이었다. 이를 위해 독일의 경제력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를 잃고 중위권 국가로 전락한 프랑스에게 2차대전의 책임이 있는 독일을 유럽통합을 통해 견제한다. 또 독일의 경제력을 이용, 유럽통합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대국 미국의 패권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드골주의). 이런 드골주의는 이후 프랑스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이라크 침략전쟁의 선봉에 선 이유도 이런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드골은 따라서 1963년과 1967년 두차례나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거부했다. 영국이 가입할 경우 유럽을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력으로 키우려는 정책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가 외교정책의 기조인 영국이 유럽공동체 회원국이 될 경우 유럽이 미국에 계속 종속된다는 우려에서였다. 드골은 이어 행정부역할을 하는 경제공동체의 집행위원회가 더 많은 권한을 확대하고 독자적인 예산을 도입하려 하자 이를 거부했다. 민족국가가 주도권을 잡고 유럽통합을 이루어내야지, 왜 다른 제3의 기구가 통합을 주도하느냐하는 것이었다. 각 회원국 장관들이 모여 의사결정을 하는 각료이사회에 프랑스는 6개월동안 장관을 보내지 않았다 (1965년 7월-12월). 공동체의 거의 모든 일이 이 기간동안 마비되었다. 결국 1966년 1월, 6개 회원국은 ‘룩셈부르크 합의’를 통해 이 위기를 극복했다. 회원국이 중요한 국익을 침해당한다고 여길 때에는 안건을 거부할 수 있다. 즉 원래 다수결이 의사결정 방식이었는데 이를 어기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공동체 확대와 정체: 1970년대 말까지 드골은 1968년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후임자가 된 퐁피두 대통령은 영국의 가입을 허용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구권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동방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서독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과 덴마크, 아일랜드는 1973년 1월1일부터 유럽공동체 회원국이 되었다. 이로써 유럽공동체는 6개 회원국에서 9개 회원국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회원국의 확대와 함께 공동체는 정체되었다. 1973년 중동전쟁의 반발로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유가가 평균 4배정도 올랐다. 각 회원국 모두 경기침체로 실업이 늘어나고 복지비용이 증가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다보니 자본과 노동력의 자유이동을 실현, 단일시장을 이루자는 목표는 멀어지게 되었다. 각 회원국이 자본을 규제하고 다른 회원국 국민이 자국으로 이주, 거주하려는 데 각 종 비관세장벽을 세웠다. 예컨대, 영국의 변호사가 독일에서 취업하려면 독일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을 별도로 따게 했다. 그러나 이런 비관세장벽에도 불구하고 회원국간 국민의 왕래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상품과 서비스가 자유롭게 이동하다보니 더 접촉을 하게되고 더 많은 출장과 여행을 하게 되었다. 지난 첫회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경제통합이 사회.문화분야의 통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런 정체과정중에서도 9개 회원국은 정치분야에서의 협력을 시작했다. 유럽정치협력 (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EPC) 이 그것이다. 각 회원국이 국방을 제외한 외교분야에서 공동입장을 취하도록 노력한다. 이를 위해 각 외무부 국장급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중요한 국제문제에 대해 공동의견을 갖도록 수시로 의견을 교환한다. 이를 위해 각 외무부간에 비밀텔렉스를 운용하며 국장급과 실무자들의 빈번한 정기모임이 상설화됐다. 또 외무장관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국제문제에 대해 유럽공동체가 한 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하는 것이지 법적구속력이 없다. 경제분야의 통합은 유럽공동체가 제정한 조약과 법규 등의 직접적인 구속을 받는다. 즉 어느 회원국이 이를 위반했을 경우,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나 다른 회원국이 위반국을 유럽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협력은 조약이라는 틀 밖에서 회원국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재판소가 이를 관할하지 못 한다. 이처럼 경기침체로 경제분야에서의 통합은 더디어지고 정치분야에서는 협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가 1981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1986년 유럽공동체에 가입, 회원국이 12개로 늘어나게 된다. 다음 호에서는 단일시장을 이루기위한 유럽단일의정서와 단일화폐 도입에 합의한 마스트리히트조약을 살펴본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유럽통합 전공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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