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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30 23:07
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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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25) 단일화폐 유로 (1) 지난 호에서는 지역정책을 분석했다. 부자 회원국과 가난한 회원국간의 지역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정책을 실시한다. 또 청년과 여성들의 재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연합의 사회기금에서 지원을 해준다. 이번에는 단일화폐, 유로를 분석한다. 왜 유럽연합 12개 회원국이 단일화폐를 사용하는가? 유럽이라는 단일국가는 아직 없고 독일과 영국, 프랑스라는 각각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유로에 가입한 각 회원국이 자국화폐를 포기하고 유로라는 단일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실험이다. 그렇다면 유로는 단순히 경제적 논리에서 출범했는가? 우선 이 질문의 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실례를 들어본다. 2001년 12월 말 영국 BBC 방송은 저녁 6시 뉴스에서 당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로마노 프로디위원장과의 인터뷰를 방송했다. 2002년 1월1일부터 12개 회원국에서 실물 유로화가 통용됨을 크게 보도하며 이를 알리는 뉴스 리포트 몇개가 나왔다. ‘유로화 통용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BBC 기자의 질문에 유럽통합에 적극적이던 프로디 위원장은 ‘유럽합중국 (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통합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BBC기자가 다시 ‘유로화라는 화폐 통용이 경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인 실험이냐’고 다그치자 프로디 위원장은 다시 한번 ‘정치통합에 이르는 큰 발걸음이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유럽통합에 소극적이며 단일화폐를 채택하지 않은 영국 시청자를 자극할 수도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유로라는 단일화폐가 역사상 초유의 실험이며 단순한 경제적 논리에서 출발하지 않았음을 명쾌하게 일깨워 주는 답변이었다. 화폐통합과 관련된 주요 일지를 보자. 1969년 12월: 헤이그 정상회담에서 1980년까지 경제화폐동맹 완성키로 합의. 1970년 11월: 베르너보고서, 고정환율제와 단일화폐 채택내용으로 하는 건의를 함. 1972년 4월: ‘스네이크 인더터널’ (Snake in the Tunnel) 1979년 3월: 유럽통화체제 (European Monetary System: EMS) 출범. 1989년 6월 마드리드 정상회담: 3단계에 거쳐 화폐동맹 출범을 건의하는 ‘들로르 보고서’ 채택.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10월3일: 독일 통일됨. 1991년 12월 유럽연합 조약 (마스트리히트 조약): 단일화폐 채택 합의. 1996년 12월: 더블린 정상회담에서 안정조약 채택 (경제화폐동맹의 안정성 유지가 목표임). 1999년 1월: 유로화 통용됨 (회원국간, 기업간 회계단위로. 그리스는 가입조건 충족하지 못해 미가입.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자발적으로 가입하지 않음). 2002년 1월1일: 실물화폐 유로화가 12개 회원국에서 통용됨 (그리스는 가입조건을 충족, 2001년에 가입함). 위의 박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일화폐 관련 논의와 계획은 최소한 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단일화폐가 원래 계획한 1980년이 아니라 1999년 출범했을까? 유럽통화체제 이전의 논의 우선 회원국간에 단일화폐를 채택하자는 논의가 1969년 헤이그 정상회담에서 처음 거론된 배경을 보자. 2차대전 이후의 국제금융체제는 미국주도의 금본위제였다. 미국의 달러화가 기축통화, 혹은 각 회원국간의 결제에 사용되는 준비통화역할을 수행했다. 고정환율제로 각 국은 환율변동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수출입을 하는 기업의 경우도 환차손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말부터 이런 안정적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미국은 엄청난 재정적자가 누적되었고 많은 달러를 찍어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국제통화체제를 유지해왔던 금본위제가 붕괴되었고 변동환율제로 바뀌었다. 당시 유럽공동체 6개국은 이런 국제통화체제의 변동에 매우 민감했다. 국내총생산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50%가 넘고 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다. 그런데 환율이 급변하니 기업도 환율을 어떻게 예상해서 교역을 하느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 1969년 12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1980년까지 단일화폐를 출범키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당시 룩셈부르크 총리이자 재무장관이던 피에르 베르너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구성, 단일화폐 채택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1단계는 회원국간 경제정책 협력을 좀더 강화한다. 2단계에서는 경제적. 제도적 협력을 강화한다. 3단계에서는 회원국간의 환율을 고정시키고 단일화폐를 채택한다. 1단계 제안에 따라 도입된 것이 스네이크 인 터널이었다. 회원국 화폐간, 달러간 일정 범위를 정해 변동하고 이 범위를 넘으면 중앙은행이 개입한다. 그러나 당시 국제통화체제의 급변과 경기침체로 이런 협력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 파운드, 이탈리아 리라, 프랑스 프랑이 스네이크 인 터널에 가입했다가 얼마있지 않아 탈퇴했다. 독일과 베네룩스 3개국만이 이를 유지했다. 물론 독일 마르크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수행했다. 유럽통화체제의 출범 1979년 3월1일부터 유럽통화체제가 시작되었다. 기존의 스네이크 인터널보다 진전된 형태이고 단일화폐가 출범하기 전까지 회원국간에 운용이 되었던 통화협력이다. 특징은 집행위원회의 참여가 배제된 회원국의 중앙은행과 정부간에 비공식협력이었다. 1977년 10월 당시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 위원장이던 로이 젠킨스 (Roy Jenkins)가 회원국간의 통화협력을 공식 제안했다. 열쇠를 지니고 있던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 긴밀히 협의, 유럽통화체제가 출범했다. 독일의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독립성을 자랑한다. 어느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고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독립성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고 또 그동안 마르크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 국민들의 신뢰를 받았다. 따라서 회원국간의 환율을 일정 범위로 제한하고 유지하며 이를 위해 회원국 중앙은행이 서로 개입한다는 환율체제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히 분데스방크의 권한이었다. 통화관리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분데스방크가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당시 슈미트 총리는 초기 단계에서 분데스방크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했다. 큰 틀이 정해지고 분데스방크가 이를 거부할 수 없게 되자 중앙은행의 참여를 허용했다. 필자는 지난해 4월 독일 본의 사회민주당 문서고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총리의 문서를 열람하면서 이 부분을 연구했다. 당시 분데스방크의 총재가 총리각하가 통화관련 논의를 회원국간에 진행하고 있다며 자신의 권한이기때문에 긴급히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몇번 보냈다. 슈미트 총리의 참모조차 진행중인 논의를 분데스방크에 통보하고 함께 논의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분데스방크가 반대할 것이 분명하고 이와 함께 논의할 경우, 통화체제의 출범이 어려울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는 보통 유럽통합사에서 ‘암흑의 시기’ 혹은 ‘유럽동맥경화증’ (Eurosclerosis)의 시기라고 불린다. 경제도 침체되고 제도적 발전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통화체제는 비록 통화부문의 협력이었지만 정치적 실험이었다. 즉 미국이 약한 달러정책을 유지하고 저이자율 정책을 실시, 많은 외국자본이 서독 마르크화를 구입했다. 따라서 서독은 외환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미국의 이런 정책을 견제하고 유럽이 국제무대에서 하나의 행위자로서 행동하기위해 유럽통화체제를 출범시켰다. 유럽통화체제의 운영방식은 다음과 같다. 각 국 경제력을 기준으로 화폐의 가중치를 메긴다 (통화 바구니). 100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당시 서독의 경제력이 제일 막강했기 때문에 독일 마르크화의 비중이 제일 높았다. 마르크화를 기준으로 각 국 화폐간 ±2.25% 환율조정이 허용되었다. 예컨대 독일 마르크화 대 프랑스 프랑의 기준거래 환율비율이 1: 2라면, 프랑화의 가치는 2.025 (마르크화대 가치가 하락할 경우), 1.975 (마르크화 대비 가치가 상승할 경우) 조정이 가능하다. 만약, 이 범위를 넘게될 조짐이 있거나 넘으면, 해당 국 중앙은행은 외환시장에 개입한다. 독일 마르크화가 당시 회원국 거래에서 기준통화로 많이 통용됐기 때문에,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도 해당 은행에 마르크화를 빌려줘, 환율의 안정을 도모하도록 했다. 제한된 범위에서 환율이 안정돼 있기 때문에 환차손의 위험이 줄어든다. 어디까지나 유럽공동체 조약이라는 틀을 벗어나 중앙은행끼리 협의를 통해 이런 환율조정이 이루어졌다. 유럽공동체 회계단위로 ECU (European Currency Unit)이 사용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통화바구니 비율을 기준으로 각 국 화폐의 가중치가 결정되었다. 유럽통화체제의 문제점은 통화가치가 약한 회원국에 조정부담이 지워졌다는 점이다. 즉 분데스방크는 되도록이면 늦게 외환시장에 개입하려고 한다. 허용된 범위에 최대로 근접했을 경우 개입해야 통화관리가 쉽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리라나 프랑스의 프랑화같이 유럽통화체제 초기에 마르크화에 비해 가치가 약한 통화였던 나라의 경우 분데스방크의 조기개입을 원한다. 시장에 신뢰를 주고 이래야만 마르크화와 자국 화폐간의 변동폭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협의를 통해 조기개입을 규정했지만 강제성이 미비했기 때문에, 프랑스 등 통화가치가 약한 나라의 불만이 매우 많았다. 또 유럽통화체제는 독일 마르크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분데스방크가 이자를 올리면 다른 회원국들도 뒤따라 이자율을 올려야 했다. 원래 1981년부터 유럽환율체제의 2단계를 도입하기로 계획됐었다. 유럽통화기금 (European Monetary Fund: EMF)를 설립, 이 기금을 운용하면서 환율을 조정한다는 취지였다. 이 기금은 회원국이 공동으로 운영고 집행위원회도 운영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분데스방크의 일방적인 독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유럽환율체제 운영 초기단계에서 회원국간의 인플레이션율 차이가 더 커지는 등 경제여건의 차이가 수렴되기 보다 더 커졌다. 유럽통화체제 출범에서 배제당했던 독일 분데스방크는 당연히 통화기금의 설립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자신들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는 기금설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럽통화체제는 불가피하게 회원국간의 협의기구로 계속 운영되었다. 프랑스는 사실상 독일 마르크화가 지배하는 유럽통화체제에서 통화주권을 되찾기 위해 일관되게 유럽중앙은행과 단일화폐 채택을 주장해왔다. 다음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79년에서 87년, 불과 8년사이 마르크화는 유럽통화체제에 가입한 회원국간의 외환시장개입통화로서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달러화의 비율이 감소하는 대신 그 자리를 마르크화가 차지했다. 79년 회원국들은 외환시장개입 통화로 마르크화를 사용한 비율이 23.7%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7년 이 비율은 59%로 급증했다. 마르크화의 가치가 안정되어 있고 독일이 최대의 경제대국이기때문에 마르크화를 신뢰했다. 따라서 외환보유고로 점차 더 많은 마르크화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했다. 유럽환율체제에서 외환시장 개입에 이용되던 통화 개입통화 1979-1982 % 1983-1985 % 1986-1987 % 미 달러화 71.5% 53.7% 26.3% 독일 마르크화 23.7% 39.4% 59% EMS회원국의 다른 통화 3.5% 4.1% 12.7% 기타 다른 통화 (엔화…) 1.3% 2.8% 2% 총계 100% 100% 100% (Denis Swann (ed.), The Single European Market and Beyond: A Study of the Wider Implications of the Single European Act (London: Routledge, 1992), p. 200). 프랑스는 잃어버린 통화주권을 찾고 싶었지만 패권을 보유한 독일이 왜 그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그러나 단일화폐를 촉진한 독일 통일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호에서는 독일통일과 이로 촉발된 단일화폐 채택, 유로화 출범과 문제점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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