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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26)
   단일화폐 유로 (2)

       지난 호에서는 단일화폐 유로의 전단계로 통화협력의 하나인 유럽통화체제 (EMS)를 분석했다. 왜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이 유럽통화체제를 설립했고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단일화폐 유로를 도입하자는 프랑스의 안, 독일의 반응, 들로르 위원회의 보고서, 독일 통일을 분석한다. 유럽통합을 급속하게 앞당긴 독일 통일을 분석함으로써 유로화 출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발라뒤르 메모랜덤과 하노버 유럽정상회담
       지난호에서 프랑스는 독일 마르크화가 유럽통화체제의 기축통화 (anchor currency)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음을 설명했다. 마르크화와 다른 회원국 화폐간의 교환비율이 정해졌고 이 비율을 넘게되면 중앙은행이 개입, 비율을 지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로부터 마르크화도 단기간-보통 3개월정도-빌려오기도 한다. 이처럼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통화패권을 분산시켜 프랑스의 통화주권을 조금이라도 찾는 것이 프랑스 유럽정책의 주요 목표이었다.
       1988년 1월 당시 프랑스의 재무장관 에뒤아르 발라뒤르는 유럽중앙은행의 설립과 단일화폐 채택을 요구하는 ‘발라뒤르 메모랜덤’을 발표했다. 유럽통화체제가 독일 주도로 마르크화에 대해 가치가 약한 프랑 등의 화폐가 가치유지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맡아왔다 (비균형적 부담). 이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단일시장 완성은 단일화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단일화폐와 이를 관리할 중앙은행 설립을 주장했다. 당시 4월에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야당인 우파와의 차별화 등이 필요, 이런 시기에 중요한 정책을 제안한 것이다.
       단일화폐 논의의 전개와 채택에 열쇠를 보유하고 있는 독일정부의 입장은 분명했다. 우선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각 국의 경제여건이 너무 상이한 상황에서 단일화폐를 채택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우선 회원국간 경제여건-인플레이션과 이자율, 실업률-이 수렴되도록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에 헬무트 콜 총리는 단일화폐를 논의할 수는 있다는 다소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정상회담과 각료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다 (1988년 상반기 6개월간). 따라서 주요 회원국의 하나가 제기한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또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자유민주당의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은 프랑스의 제안을 적극 지지했다. 서로 다른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을 때 상호간의 정책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보통 흔하다.
       이에따라 1988년 6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유럽정상회담 (European Council)에서 각 회원국 수반은 들로르 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당시 자크 들로르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위원장으로 12개국 중앙은행 총재와 3명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경제화폐동맹을 이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연구, 보고하는 것을 임무로 부여받았다. 당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양자회담에서 들로르 위원회 구성에 대체적으로 합의했다. 콜 총리는 이런 조치에 반대할 것이 분명한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를 회유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즉 중앙은행 총재들은 보통 자신들이 행사하고 있는 통화정책 권한을 잃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이들로 위원회를 구성, 일을 맡기면 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대처를 안심시켰다.
       이듬해 4월 들로르 위원회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단계에 걸친 단일화폐 채택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단계는 모든 회원국들이 유럽통화체제의 환율조정기구 (Exchange Rate Mechanism: ERM)에 가입한다. 그리고 자본이동을 자유화한다. 당시 영국과 독일의 제외한 상당수의 회원국들이 기업간 거래가 아닌 환투기를 막기위해 자본이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2단계는 회원국간 경제정책의 조정을 강화한다. 서로 상이한 이자율과 인플레이션율 등을 어느 정도 범위안에 들도록 큰 틀안에서 상호 조정할 것을 규정했다. 그리고 통화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통화기구 (European Monetary Institute)의 구성을 제안했다. 마지막 3단계는 유럽중앙은행의 발족과 각 회원국간 환율을 고정시키고 단일화폐를 채택하는 것이다. 6월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들로르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당시 환율조정기구에 가입하지 않았던 영국은 이의 가입을 두고 정부내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다. 마가렛 대처 총리는 ‘조건이 성숙되면’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환율조정기구의 가입을 꺼렸다. 어떤 경우에도 통화주권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재무장관이던 나이젤 로슨 (Nigel Lawson)과 제프리 하우 (Geoffrey Howe) 외무장관은 환율조정기구에 가입시 물가안정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며 가입을 주장했다. 마드리드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비공식 각의에서 대처는 참석자 대부분의 가입의견을 무시했다. 당시 3선의 위업을 이룩하고 승승장구하던 대처는 이처럼 내각제의 기본 운영틀인 다수의견을 무시했다.  대처는 마드리드 정상회담에서 영국이 1단계 환율조정기구에 조만간 가입하겠다는 정도만 양보했다. 그리고 2, 3단계는 가입을 거부했고 단일화폐 도입을 위한 정부간회의 (Intergovernmental Conference)의 소집도 거부했다.

                                         독일통일과 단일화폐
       그러나 단일화폐 도입을 앞당긴 독일통일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1989년 11월9일 자정무렵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28년간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프랑스와 영국 등 주변국들의 반응은 공식적으로 환영을 표했지만 내심으로는 독일의 강대국화에 큰 우려를 했다.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됨으로써 1,2차 대전에 책임이 있고 유럽의 평화를 짓밟았던 ‘독일문제’가 잠정적으로 해소된 것처럼 보였다. 두 나라로 분단돼 있었지만 당시 서독 인구는 6천만명이 넘었고 유럽공동체 제1의 경제대국이었다. 또 서독은 분단국이었기 때문에 유럽통합에 적극적이었다. 유럽통합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 주변국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거대한 유럽시장을 통해 경제부흥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한나라가 되면 인구 8천만명에 최대의 대국이 된다. 또 분단을 극복했는데 구태여 유럽통합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것이 당시 많은 유럽 정치지도자들의 의견이었다.  
       헬무트 콜 총리의 외교보좌관으로 ‘329일: 독일 통일에 대한 내부인의 견해’ (329 Tage: die Innenansichten der Vereinigung,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1월9일부터 통일된 이듬해 10월3일까지가 329일임)라는 책을 쓴 호르스트 텔칙은 당시 본주재 프랑스 르몽드지 특파원과의 대화내용을 싣고 있다. 그 특파원은 위 패러그패프에서 든 논리를 인용하며, ‘독일은 다시 3각 동맹에 의해 위협받을 것이다’라는 경고를 했다. 즉 1차대전 직전에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독일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했던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러나 텔칙의 대답은 간단했다. 통일이 다가왔고 주변국들이 독일의 강대국화를 우려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독일은 유럽통합에 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할 것이다. 르몽드 특파원이 이처럼 직설적으로 서독을 비난한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후 20일이 지난 1989년 11월 29일 콜 총리가 의회에서 발표한 ‘독일 분단과 유럽분단을 극복하기위한 10개항’ 때문이었다. 장벽붕괴이후 주변국들이 독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콜 총리는 유럽통합안에서 독일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언제, 어떻게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는 않았지만 당시 상황에서 프랑스와 영국, 소련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소련의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에게 격노했다. 고르바초프는 콜의 10개항이 자기 멋대로 독일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선전포고라며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겐셔는 회고록에서 적고 있다.
       실제로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콜 총리의 10개항 발표이후 수차례 만나 독일을 견제할 방법을 논의했다. 통일 독일이 강대국이 되면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모두 국제정치무대에서 독일보다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좀 더 냉철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 (North Atlantic Treaty Organisation : NATO)의 회원이 되는한 독일 통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냉전 붕괴이후에도 유럽세력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미국에게 통일 독일이 없는 나토는 무의미했다. 서유럽에서 가장 큰 대국이고 경제력에서 제일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또 나토가 설립된 초기 목표가 소련과 독일에 대한 견제, 즉 이중견제 (double containment)가 필요했었고 냉전붕괴이후에도 이런 필요는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에게 독일의 정책을 납득시키기 위해 수차례 모임을 가졌다. 유럽통합의 틀안에서 통일을 완성할 것이며 단일화폐 도입 협상을 위한 정부간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결국 1989년 12월 8-9,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정상회담에서 경제화폐동맹 채택을 협상하기 위한 정부간 회의를 1990년 12월부터 소집한다고 합의되었다. 물론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정부간 회의 소집을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회의소집은 다수결의 찬성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1990년 4월 콜 총리는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당시 유럽정상회담과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이던 아일랜드에서 공동서한을 보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이 다당제를 도입하는 등 큰 격변이 있다. 유럽통합을 완성하기 위해 경제화폐동맹을 협의할 정부간회의이외에도 정치연합 (political union)을 논의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정부간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6월 유럽정상회담에서 이 안건이 채택되어, 경제화폐동맹과 정치연합을 논의하기 위한 정부간 회의가 12월부터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단일화폐가 도입된다는 것은 독일 마르크화가 행사하던 통화주권과 패권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콜 총리는 국내의 반대의견을 무마하기 위해 정치연합을 논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단일화폐가 채택되면 경제통합은 거의 완성된다. 그러나 경제화폐동맹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회원국들이 외교와 국방에서 더 긴밀하게 협력하고 유럽의회의 권한도 강화시켜야 한다. 거의 연방정부 비슷하게 운영이 되어야 유럽통합도 완성되고 경제화폐동맹도 제대로 운영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티모시 가튼 애시 (Timothy Garton Ash)는 유럽은 베를린 장벽부터 독일이 통일된 1990년 10월 3일까지 약 11개월 남짓한 기간에 과거 40여년간 발생한 일보다 더 큰 일이 발생했다고 이 시기를 규정했다. 또 자크 들로르 집행위원회 위원장도 독일 통일 이라는 대사건을 두고 ‘역사-유럽통합의-를 가속화했다’라고 규정했다. 1년이 채 안되는 시간에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보였던 단일화폐 도입을 위한 협상이 시작됐다.
       단일화폐가 단순한 경제적 논리가 아닌 매우 정치적인 이유로 도입이 논의됐고 채택이 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과 논리를 이해해야 단일화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또 영국이 왜 유로화 가입을 꺼리고 있는지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유럽통화체제라는 통화협력이 있었다. 또 당시 집행위원회는 단일시장은 단일화폐를 필요로 한다 (One Market, One Money)라는 논리를 펴며 단일화폐를 의제로 상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이라는 대사건, 그리고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마르크화의 패권을 포기하겠다는 독일 정부의 정책이 없이 언제 단일화폐가 출범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호에서는 정부간 회의에서 격론을 벌였던 단일화폐 관련 주요 쟁점과 유로화 출범 등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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