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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7 02:50

독일과 유럽통합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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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통해 본 유럽통합 (39)
   독일과 유럽통합 (4)

       지난 호에서는 2대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3대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의 유럽통합 정책을 분석했다.
       이번에는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그의 동방정책과 유럽통합정책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독일과 유럽통합 주요 연표: 1969-1974년까지>
       1969년 10월28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됨 (여당에서 야당으
      로 20년만에 정권교체). 사민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 출범.
       1969년 12월: 유럽정상회담 (헤이그)
       1970년 3월/5월: 브란트 총리,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와 정상회담 (에어푸
       르트와 카셀에서 )
       1970년 8월12일: 모스크바 조약 체결
       1970년 12월7일: 바르샤뱌 조약 체결
       1971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 수상
       1972년 4월27일: 야당인 기민당/기사당이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투
       표 제기했으나 거부당함.
       1972년 11월19일: 조기 총선에서 사민당은 최초로 과반수 확보. 자민당과
       계속해서 연립정부 구성함.
       1972년 12월21일: 동서독 기본조약 (Grundlagenvertrag) 체결.
       1973년 10월: ‘유럽의 해’ (Year of Europe)를 두고 미국과 갈등.
       1973년 12월11일: 프리하 조약 체결
       1974년 5월6일: 스파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퇴함.
        

1)        빌리 브란트와 유럽통합
       1969년 10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했다. 1949년 건국이후 독일은 20년간 기민당/기사당-자유민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20년만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특히 1966-1969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는 나치정권 시절 외무부 고위공무원을 지냈다. 이 때문에 그는 전후 미군에게 체포돼 몇달간 나치에 연루된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전력은 그의 총리재직시절 내내 그를 괴롭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빌리 브란트는 나치에 대항해 투쟁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1933년 20살 때 그는 덴마크를 거쳐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후 사회민주당과 브란트가 당원이던 사회민주당 좌파인 사회노동당 (SAP: Sozialistische Arbeiterpartei)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1940년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사회노동당 활동과 언론인으로 일했다. 1945년 전쟁이 종료된 후 독일로 돌아왔다.
       브란트의 이런 투쟁경력은 서독이 점차 국제무대에서 정상적인 국가로 복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유럽공동체 6개 회원국에서 최대의 경제대국이던 독일은 점차 국제무대에서 경제력을 정치력으로 전환,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취임후 한달이 지나 열린 헤이그 유럽정상회담에서  정체에 빠져있던 유럽공동체 진로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다. 브란트가 총리에 취임하던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드골 대통령이 물러나고 후임자 조르쥬 퐁피두가 대통령이 되었다. 브란트와 퐁피두는 헤이그 정상회담 직전 만나 주요 현안을 논의했고 이런 합의를 바탕으로 헤이그 정상회담은 여러가지 미해결 문제를 타결지을 수 있었다.
       헤이그 정상회담은 유럽통합사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중요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타결사항은 보통 ‘완성, 심화, 확대’라고 표현된다. 1965년 5월 당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공동농업정책에 대한 자체재원을 마련하고 이럴 경우 유럽의회에 예산심사권을 주며 정책결정을 다수결로 한다는 집행위원회의 안을 거부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점은 정책결정을 다수결로 할 경우 이를 거부하려면 회원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했다. 다수결이 도입되면 그만큼 유럽공동체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위원회가 통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드골 대통령은 위대한 프랑스를 구속할 이런 다수결 결정에 강력반대, 1965년 후반기에 프랑스 각료들을 공동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프랑스 장관들의 자리가 비어있었다고 해서 당시 공동체 위기는 ‘빈의자 위기’라고 불린다.
       헤이그 회담에서 공동농업정책의 재원마련, 아울러 공동체 예산재원에 대한 큰 틀이 합의가 됐다. 따라서 미해결 문제를 매듭지었기 때문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회원국간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고 통화동맹도 논의하기로 했다 (심화). 국제현안에 대한 협력강화와 통화동맹은 프랑스 주도로 국제무대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서독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브란트 총리 취임이전에도 서독은 일부 동구권 국가와 국교를 수립했다. 브란트는 취임 연설에서 새로운 동방정책을 표방했다. 또  동독과의 관계도 ‘두 개의 나라, 외국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써서 어떤 식으로도 관계를 수립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지도층은 서독의 이런 움직임을 불신의 눈으로 주시했다. 따라서 서독의 동구권 관계를 어느정도 견제하기 위해 국제 외교문제에 대한 회원국간의 협력강화를 제시한 것이다. 이어 드골이 1963년과 1967년 두번이나 거부한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도 합의가 되었다. 헤이그 정상회담이 종료되고 몇달이 지난 1970년 4월 자체재원 도입을 골자로 하는 예산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어 2달이 지난 6월 영국과 덴마크,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 4개국은 유럽공동체와 가입협상을 시작했다.


       2) 동방정책과 유럽
       브란트 정부는 동독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1970년 3월과 5월 두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동독정부가 소련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다. 이에따라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가 급선무임을 인식, 취임후부터 비밀외교를 추진해왔으며1970년 8월12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소련과 독일은 국제분쟁에서 무력사용을 포기했다. 또 독일은 2차대전이후 잃어버린 슐레지엔 (Schlesien) 등의 동구권 영토를 포기하기로 약속했다. 폴란드에 있던 슐레지엔 등 구 독일 영토에서 최소한 1천만명이 넘는 난민들이 독일로 몰려왔다. 2차대전 막바지 파죽지세로 공격을 감행한 소련군을 피하거나 전후 폴란드 정부가 이곳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하루 아침에 쫓아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패망했고 점령당했던 독일은 이런 대규모 추방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브란트 총리가 이런 영토를 포기한다는 조약에 합의한 것은 당연히 실향민단체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상당수의 이런 단체가 바이에른주에 터를 잡고 있었다. 이곳은 기사당의 본거지이다. 당연히 야당은 이런 조약에 반대하며 브란트 정부를 비난했다.
       이어 1970년 12월7일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했다. 폴란드는 2차대전중 나치정권의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이다. 특히 이곳을 방문한 브란트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며 나치의 잔악상을 사죄했다. 당시 유태인들이 수용돼 있던 게토에서 약 4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일부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숨졌다. 나치와 투쟁했던 브란트였지만 서독의 대표로서 역사적인 사죄를 한 셈이다.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며 과오를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의 지도층과 아주 대조적이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으로 동구권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그리고 우선 평화가 확보돼야 자유도 얻을 수 있다는 원칙을 유지, 평화를 관리하면서 동구권과 자주 접촉함으로써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 동방정책의 주창자로서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국내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극심했다. 야당인 기민당과 기사당은 브란트가 체결한 모스크바, 바르샤바 조약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라고 강력 규탄했다. 브란트가 포기한 구독일의 영토는 국제법적으로 아직도 독일의 영토인데 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야당은 의회에서 동방정책의 비준을 거부하며 1972년 4월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제기했다. 총리가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총리를 갈아치우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불신임투표는 거부되고 야당은 궁지에 몰렸다. 브란트의 정책은 상당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어 조기 소집된 총선에서 중.고등학생까지 나서 브란트 총리의 유세를 지원했다. 이런 압도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1972년 11월 열린 조기총선에서 브란트는 사민당 최초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사민당은 242의석을, 기민당/기사당은 234의석을 얻었다. 총선에서 국민들이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지지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 12월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경제와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교류를 강화하며 상주대표부 교환을 명시했다. 두 나라가 외국이 아니기 때문에 대사가 아닌 상주대표부를 교환했다.
       당시 야당이나 일부 정치학자들은 브란트가 동방정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유럽통합정책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브란트 자신은 동방정책에 열중하면서 프랑스와 주변국들의 의구심과 반발을 무마시키려면 유럽통합에 적극적이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적극 지지했다. 또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납부하는 예산이 문제가 됨을 알고 영국이 요구한 지역개발기금의 설립을 지지했다. 낙후된 지역을 지원해주는 기금이다. 당시 서독이 유럽공동체에 가장 많은 예산을 납부했기 때문에 서독으로서는 지역개발기금 도입을 반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 운영에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수용했다.
       또 1973년 10월 발발한 중동전쟁을 계기로 유럽공동체는 미국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미국은 초강대국, 유럽은 지역파워’라는 어구를 쓰며 유럽의 위신을 깎아내렸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이런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며 유럽의 정체성을 확립하자고 주장했다. 서독정부는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드러내놓고 미국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은 컸다. 많은 조율과정을 거쳐 1973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9개 회원국들은 유럽정체성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다. 유럽의 단결과 국제무대에서 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빌리 브란트는 비전의 정치가였다. 그러나 중동전쟁 발발로 유가가 몇배 치솟고 실업자가 급증하는 등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란트 총리의 개인비서로 일했던 귄터 귀욤이 동독의 스파이였음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총리가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브란트는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사임후에도 브란트는 사민당 총재의 직을 유지하며 각 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임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녈 (Socialist International)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다음호에서는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안병억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박사과정 (anpye@hanmail.net)






(브란트 총리의 선거 포스터: ‘귀하가 내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이라는 문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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