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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4 20:29

독일과 유럽통합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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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서는 헬무트 콜 총리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했다. 1982년 10월 취임부터 1989년 전반기까지를 상술했다.
       이번에는 헬무트 콜의 통일정책을 분석한다. 통일정책과 유럽통합의 연관성이 분석의 핵심이다. 독일 통일이 유럽통합의 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독일과 유럽통합 주요 연표: 1989년상반기부터—1990년까지>
        1989년 5월7일: 동독 지방선거. 결과조작으로 사회통일당 정권유지
        1989년 5.30-3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서독 공식방문. 서독을 ‘동반 지
        도자’ (partner in leadership) 라고 추켜세움.
        6. 12-15일 :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서독을 공식방문
        7월-8월: 수십만명의 동독인들 헝가리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건너감. 혹은
        동베를린, 프리하, 부다페스트 주재 서독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함.
        9.10-11일: 헝가리,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개방.
        10월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고르바초프는 “인생은 늦게 오는
        사람을 벌한다”며 동독의 반개혁적인 정책을 비판함.
         10월18일: 에리히 호네커 사회통일당 서기장직에서 사임함.
         10월--11월초: 동독 전역에 걸쳐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짐.
         11.9일 자정-11.10일 오전: 베를린 장벽 붕괴됨.
         11.18: 특별 유럽정상회담 파리에서 열림 (동독 및 동구권 사태 논의)
         11.28: 헬무트 콜 총리 <독일과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10개항> 연
         설.
         12.9: 유럽정상회담 (스트라스부르), 독일인의 자결권 인정.
         1990.1.28: 동독의 모드로우 총리, 의회선거를 5월에서 3월로 앞당기기로
         결정.
         2.7: 서독 정부내 <통일 위원회> 설립, 화폐동맹 추진 결정.
         2.12-14: 독일 통일의 외부문제를 다루는 <2+4 회담> 개최키로 합의.
         3.18: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급속한 통일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독
         일 연합>이 승리.
         4.18: 콜 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유럽정치연합 관련 정부간 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공동서한을 보냄 (4.28: 더블린 유럽정상회담에서 이 문
        제를 논의함. 세부 사항을 보고하도록 회원국 외무장관에게 지시).
        5.18: 동서독, 통화.경제.사회동맹 체결.
        7.1: 이 조약 발효. 서독 마르크화가 동독에서 화폐로 통용됨.
        7.5-6: 나토 정상회담 (런던), 소련과 동구권에게 협력하자고 제안.
        7.14-16: 헬무트 콜, 소련 방문. 통일독일의 나토회원 가입 허용이 공식 발
       표됨.  
        10.3: 독일 통일됨.


       지난 2003년 독일에서 영화 ‘굿바이 레닌’ (Good bye Lenin!)이 개봉돼 인기를 끌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과 장벽 붕괴이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동베를린에 거주하던 한 동독 청년의 눈을 통해 본 통일과정을 그려낸 영화였다. 때로는 재치있게, 비판적으로, 그리고 슬프고도 기쁘게 당시를  묘사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어머니는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내가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을 보고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다. 어머니가 갑자기 깨어났을 때 이미 통일과정이 진전돼 구 동베를린에 서독 물건이 다 오고 레닌 동상도 부서졌다. 효자인 나는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온 방안을 구 동독 시절의 신문뉴스로 꾸미고 친구와 함께 텔레비전 뉴스도 자체 제작, 아직도 동독이 건재하고 있듯이 매일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다. 결국 어머니는 동독이 앞장서 장벽을 허물고 서독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알고 세상을 떠난다.
       급속한 독일 통일과정, 이를 받아들이는 동독인들의 심리상태, 그리고 당시의 역사적인 장면 등이 많이 나오면서 동독인들에게 아련한 지난날을 생각케 하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1) 붕괴된 동독
        이 시리즈 처음 몇회에 유럽통합이 시작된 주요 원인중의 하나가 ‘독일 문제’임을 설명한 바 있다. 1, 2차 대전의 책임이 있고 유럽의 평화를 짓밝았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통합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통합 물꼬를 튼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고위기구 (High Authority)라는 초국가기구가 있었다.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관리하는 기구였다. 독일은 이런 기구를 통해 주권을 회복했고 프랑스 등 다른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은 이 기구를 통해 독일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어할 수 있었다.  독일은 일부 주권을 내줌으로써 주권을 회복해 왔다. 그러나 2차대전이후 체결된 조약으로 미국과 프랑스, 영국은 서방 전승국으로써 독일과 베를린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여전히 서독의 주권은 제한을 받았다. 그럼에도 서방전승국들은 독일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독일 분단이 2차대전의 결과이고 소련은 동구권을 영향권으로 두기 위해 2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2차대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1985년 3월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독일 통일이 아주 먼 훗날의 일에서 약간 앞당겨졌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이들조차 불과 1년 남짓안에 독일이 통일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련이 동독을 포기한다는 것은 2차대전 이후 형성된 전후질서를 포기함을, 즉 소련제국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우선 동독 내부에서 붕괴가 시작됐다. 1989년 7월부터 8월, 수십만명의 동독인들이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넘어왔다. 당시 동독인들은 해외여행에 필요한 비자없이 헝가리를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로 몰렸다. 또 일부는 동베를린, 프라하, 부다페스트 주재 서독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배가 침몰하리라는 것을 알고 떠나는 선원들과 같았다고나 할까. 동독인들의 대규모 망명이후 10월, 동독의 주요 도시에서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매일 벌어졌다. 당국에 해외여행을 신청하면 허가를 얻기에 걸리는 시간도 너무 길었고 또 명확한 이유도 없이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동독인들은 해외여행 허가를 빨리, 기간의 제한없이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당시 시위대가운데 어느 누구도 정권타도를 외친 사람은 없었다. 수세에 몰린 동독 공산정권은 여행자유화를 발표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즉시 모든 해외여행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 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쪽으로 몰려갔다. 엄청난 시민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경비병들은 어쩔 줄 모르며 총을 쏘지 않았다. 이로써 1961년 파시스트를 저지한다며 세웠던 베르린 장벽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당시 붕괴직전이던 동독정부의 행정이나 명령체계가 형편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유럽통일의 과정속에서 독일 통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과연 독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장벽 붕괴후 10여일이 지난 후 발간된 동독 민간단체의 유인물을 읽은 적이 있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흡수통일에 반대한다며 사회민주주의를 갱생시켜 제3의 길로 통일을 이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장벽붕괴이후 바로 흡수통일을 예상했던 것이다.
       국토분단과 유럽통합으로 제어되었던 독일문제 –분단된 독일의 통일양식과 시기, 통일된 독일의 유럽내 위치 - 가 급부상하자 당시 유럽정상회담과 각료이사회 순회의장국이었던  프랑스는 매우 우려했고 당황했다. 이 때문에 특별 정상회담과 정기 정상회담을 통해 유럽통합의 틀 속에서 독일 통일을 강조했다. 독일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존 구도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프랑스와 영국 등 주변국들이 독일 통일에 대해 우려했던 것은 통일 이후 독일이 최대의 강대국이 되어 일방주의 외교노선을 펼치지 않을 까 하는 우려에서 였다. 특히 11월28일 헬무트 콜 총리가 의회에서 행한 ‘독일과 유럽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10개항’ 연설은 이런 우려를 더 자극했다. 콜 총리는 이 연설에서 독일분단은 유럽분단이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통일정책을 실시하겠다. 그리고 점진적인 유럽통합의 틀 속에서 통일정책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했다. 아울러 동독정부가 자유선거를 허용하고 지속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해야 지원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는 일종의 큰 원칙을 표명했다. 그러나 1, 2차 대전을 통해 독일이라면 이를 득득 갈았던 주변국들은 이런 원칙조차 서독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의 시초라고 간주했다.
       주변국들은 그만큼 독일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지니고 있었다. 보통 때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순간에 가슴 깊은 곳에서 분출하는 이런 불신이었다. 따라서 콜 정부는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유럽통합의 틀 속에서 독일통일이 이루어짐을 납득시켜야 했다.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프랑스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단일화폐 도입을 논의하는 정부간회의를 1990년 말부터 열기로 합의했다. 단일화폐라는 것이 독일 마르크화가 행사하던 통화패권을 새로운 단일화폐로 넘겨주는, 독일로서는 가장 중요한 국력의 원천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콜 정부는 아무 조건도 없이 마르크화를 포기한다는 국내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단일화폐를 운영하려면 일종의 연방국가 체제를 필요로 한다며 정치연합 논의도 하자고 제안했다. 공동외교안보정책도 강화하고 유럽의회의 권한도 강화하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이런 제안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지 않았다. 프랑스의 우선순위인 단일화폐 도입 논의가 정치연합 논의때문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다른 회원국들도 정치연합에 대해 그리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독일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런 논의과정을 거쳐 콜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정치연합을 함께 논의하자며 다른 회원국에 제안했고 이 제안을 수용됐다.
       이처럼 유럽통합의 틀 속에서 독일 통일도 이루어졌다. 1990년 2월 서독정부는 흡수통일 방안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미 동독은 붕괴되었고 장벽 붕괴이후 하루에도 몇 천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을 동독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흡수통일밖에 없었다. 또 당시 동독 정부도 5월에 예정된 총선을 3월로 앞당겼다. 흡수통일이냐 혹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연방국가를 만드는 가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서독 콜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의 자매정당격인 동독의 독일연합 (Allianz fuer Deutschland) 은 흡수통일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에 탄탄한 조직기반을 가지고 있던 사민당은 동독 사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점진적인 통일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3월 총선에서 동독 국민들은 급속한 흡수통합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장벽 붕괴후 억압된 독재정권에서 벗어난 시민들은 하루빨리 서독인들처럼 자유롭고 풍족하게 살기를 희망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이런 점을 적극 이용했다. 경제논리를 따른다면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로 환전할 경우 서독 1마르크에 약 3-5 동독 마르크화 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환전비율을 1:1로 결정했다. 만약에 경제논리를 따라 1:3, 1:5로 할 경우 동독인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매우 가난하게 된다. 돈의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동독인들이 콜을 좋아했겠는가? 물론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이런 환율이 동독경제를 급속하게 붕괴시키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킨다며 반대했다. 그리고 분데스방크의 이런 예상은 통일이후 현실로 드러났다.
       급속한 흡수통일, 이에 따르는 천문학적인 통일비용. 이런 점 때문에 콜의 통일정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시 ‘기회의 창문’ (windows of opportunity)은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열려 있었다. 따라서 이 기회를 적절하게 이용해야만 했다. 헬무트 콜은 이 기회를 아주 잘 이용한 통일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는 불가피하게  부작용이 뒤따랐다.
       다음호에서는 통일 이후 1998년 10월 물러날때 까지 헬무트 콜의 유럽통합정책을 분석한다.
                  안병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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