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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5.02.23 02:14
최지혜의 예술칼럼 (13) 신명나는 굿판속에서 진정한 소통이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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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20일, ‘동양의 보이스’라 불리는 백남준(1932-2006)이 굿판을 벌였다. 절친인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를 위한 ‘추모 굿’이었다. 산자와 죽은자가 맛난
이 날 굿장면은 소르본대 교수이면서 방송연출가인 장 폴 파르지에에 의해 프랑스 전역에 방송됐다. 1963년 3월, 요셉 보이스가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을 때 젊은 동양 청년이 갑자기 나타났다. 도끼로 전시 중인 피아노를 부숴버렸다. 이것이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의 충격적인 해프닝같은 만남이었다. 언제나 억압된 현실에는 그것에 대항하여 막힌 통로를 뚫고자 하는 소통을 위한 움직임들이 일어난다. 샤머니즘에서 원시적 생명력과 예술적 착상·영감 그리고 쾌감을 경험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스스로 샤면 아티스트가 되어 진정한 소통을 위해 신명나는 굿판을 벌였다. “나는 코요테에만 전념하겠다. 코요테 이외의 미국을 일절 보지 않겠다”, 1974년, 미국 뉴욕 케네디 공항에 모자를 눌러쓴 한 사나이가 막 도착했다. 펠트 천에 싸여 들것에 실린 채 미리 대기시켜 놓은 구급차로 옮겨 타고는 르네 블록(René Block) 갤러리로 향하였다. 구급차가 달리는 동안
그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창문 밖으로 단 한번의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커다란 펠트 천을 두른 채 지팡이만 내놓고 코요테와 소통을 시도하였으나, 성질이 사나운 코요테는 조심스럽게 그의 주변을 빙빙 돌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 코요테가 그에게 익숙해지자 펠트 천을 벗고 코요테와 함께 창 밖을 바라보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코요테를 품에 안았다. “나는 스스로의 위치를 벗어나 별개의 영역에 몸을 던져 거기 살고 있는 것들과 동일화를 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별개의 영역에서 존재와 자유, 자각에 도전했던 것이다”고 했다.
<코요테,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 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의 한 장면, 1974 건초더미, 펠트 천, 월스트리트 저널 등을 깔린 갤러리에서 야생 코요테와 벌린 굿판이 일주일이 지날 쯤, 그는 코요테에게 키스를 해주고는 도착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외부와의 접촉없이 미국을 떠났다. 예술적 굿판을 소통의 도구이자 자유로운 창조의
출구로 삼아, 잃어버린 아메리카의 참모습, 아메리카 땅이 겪은 정신적 충격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현대 미술의 뜨거운 아웃사이더답다.
현대 미술의 아방가드르의 극치, 요셉보이스 그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전투기 부조종사로 당한 비행기 사고에서 타타르 족이 동물 지방과 펠트 천으로 정성껏 간호하여 목숨을 구해준 것을 자신의 중요한 작품 모티브로
사용했다. 즉,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과 대량죽음의 위기에 처한 인류의 근본적인 상처 치유를 위해서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미술계에 뛰어들자마자 충격적인 굿판을 벌이며, 샤면 아티스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내 삶은 예술이고, 예술은 내 삶이다(Mein Leben
ist Kunst ist mein Leben)”라고 주장하며, 모든 페로소나를 벗어던지고
잘나든 못나든 자신의 본질의 모습을 까발리라고 했다. 조각, 드로잉, 약 50개의 설치 미술 작품, 70여회의 퍼포먼스 등 130번 이상의 개인전을 통해 그는 예술과 삶의 일치를 평생토록 추구하면서 몸소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정치적 상황과 사회 문제에 적극 개입하였고 또한 자신을 구해준 타타르 족들의 동물 지방과 펠트 천, 그리고 마가린과 꿀 따위를 사용하여 상징적으로 따뜻하고 유기적인 인간관계를 표현했다. 교육자로서 "내가 있는 곳이 곳 아카데미다!"라는 신념으로 투쟁하였으며, “민주주의는 재미있다!”라고 하면서 정치와 사회 문제를 항상 미술과 연관시켰다. 환경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활동으로 녹색당에 가입하여 출마했으나 떨어진 일도 있었고, 자유로운 환경에서의 학문연구를 위해 ‘자유 국제 대학(FIU)’을 설립 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에서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을 중시하여 수많은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기도 했으며 1972년 '도큐멘타 5'에서 100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민주주의와 미술에 대하여 관람객과 집단토론을 벌였다. <어떻게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ere?) > 이번에는 순수한 인류의 직관에 대한 존엄성을
충격적이고 엄숙한 굿판을 통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처럼 말을 한다.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요셉 보이스, 1965년 1965년, 펠트 천과 강철로 된 구두를 신고 죽은 토끼를 안은 채 3시간 동안, 들리지 않는 속삭임으로 토끼에게 자신의 드로잉을 설명하였다. 전통 미술과 미술제도를 비판하면서 현대 유럽과 미국의 상황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가면을 쓴 썩어빠진 인간보다는 무구한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역설하면서 메를로 퐁티의 후기
현상학의 직관을 강조하였다. 탄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토끼를 이용해, 그는 "순수한 정신, 정확한 해석에 연연하지 않는 정신은 모든이에게
있다"고 말했다. 같은 해에 며칠 동안 단식한 후, 조그만 상자 위에 올라가 24시간 동안 인간 본연의 본능적인 온갖 동작을 보여주는 <액션 24시간>이라는 퍼포먼스도 감행했다. 1982년에는 카셀 시에 7000그루의 나무를 심는 환경운동이자 퍼포먼스의 일종인 <7000그루 참나무> 프로젝트를 시작해 역사와 시간, 인류와 생명체에 대한 인식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샤면 아티스트로서 세상의 부조리를 직관하면서 격렬하고 신명나는 굿판을 벌인 요셉 보이스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다”고 말했다. 인간이기에 자유롭게 자신의 창의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산물이 바로 예술이고, 우리는 이 예술을 통해서, 본질을 잊어버리고 황폐해진 비인간적인 삶과 사회의 치유와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무겁고 역겨운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운 본질을 들여다봐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순수한 샤면이 되어 자연을 자연으로 느끼고, 인간을 인간으로 느낄 때 진정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예술의 한계와 죽음·탄생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쉼없는 의문을 던진 그가 이러한 주제를 끊임없이 실험하면서 원했던 것이 바로 이 진정한 대화와 소통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약 30년이 지난 현시대에도
필연적인 것이며, 사람들이 그를 그리며
또한 그를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예술가 중 하나로 기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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