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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13:51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조회 수 2231 추천 수 0 댓글 0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여전히)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에 나오는 대사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울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즉, 차라리 모르는 남이라면, 내가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는 게 오히려 쉬울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모르는 남을 이해한다기 보다 더 정확히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결코 상관하지 않을 수가 없고, 아니 상관을 넘어서 어쩌면 우리는 은연중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이해와 기대에 철저히 부응하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다행히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이해와 기대에 부응해주면 금상첨화겠지만, 사람이라는 게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고, 그야말로 각각의 개성을 가진 존재다 보니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생기고 기대를 저버리는 상황도 발생하는 게 우리들의 삶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면 너무나 야속하고 상대방이 원망스럽고 안타까울 것이다. 서로가 자신의 이해와 기대 속에 상대방을 맞추려 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남는다. 차라리 남이었더라면 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그러려니 해줄 수도 있는 일을,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용납하기가 어렵고 실망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렵고 나의 이해와 기대 속에 들어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결국은 서로 다른 존재인데, 너무 사랑하다 보니 그렇게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 채, 그래서 마치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존재처럼 여기기에 상대방이 나의 이해와 기대를 벗어나는 것을 참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마치 규격상품처럼 교육받고, 일종의 표준화된 삶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용납되기가 어려운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나에게는 분명 가장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것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이 있다. 사실, 서양에서였다면 아무런 특이한 것도 아닐 것들인데, 동양에서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이하다고 치부하는 요소들을 나는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힘들게 했고, 또 그로 인한 죄책감과 부담감으로 나 자신도 너무나 힘들었다.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이해와 기대에 가두려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상대방이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양보해야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마치 뭐에 씌우기라도 한 듯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밀어부치면서 상대방을 나에게 맞추려 했다. 내 나름대로는 그것이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었지만, 결국은 잘못된 방식이었던 것 같다. 비록 나의 이해와 기대에 벗어나는 것일 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감싸주는 방식이 상대방에게는 더욱 사랑으로 다가왔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상대방이 나한테 필요로 했던 진정한 사랑이었을텐데...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의 저 대사는 목사인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사망한 둘째 아들에 대해 설교를 하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첫째 아들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흘러가는데, 즉 첫째 아들이 이 영화를 집필한 작가인 셈이다. 첫째 아들은 동생(둘째 아들)이 사망한 뒤 아버지가 했던 설교를 잊지 못한다면서 저 대사를 들려준다. 평범하고 부모의 기대에 무난히 부응했던 형과는 달리 가족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개성을 지녔던 동생, 결국 그 동생 스스로 초래한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가족들... 아마도 목사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속도 무척이나 상하셨을 터, 게다가 자식으로서는 최고의 불효인 부모보다 먼저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말 속상하다는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의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면서, 결국 사랑이 이해마저도 감싸 안는다는 삶의 진리를 들려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저마다의 삶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가 서로의 이해와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애쓰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도무지 이해되어지지 않는 상대방이 너무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심지어 그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을 경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부터 인간은 어느 누구든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다행히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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