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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와의 전쟁인가 레임덕과의 전쟁인가

지난 12일 이완구 총리가 취임 후 첫 대국민담화문에서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어 박대통령이 17일 국무회의에서 “부패 척결에 범정부적 역량을 결집해달라”고 요구하자, 20일에는 국무총리실 주관으로 사정기관 차관들이 참석한 ‘부정부패 척결 관계기관회의’를 열어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통영함 납품비리 연루 의혹을 받는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 22일 구속됐고, 정치자금 비리 의혹으로 포스코 건설과 경남기업에 수사가 집중되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선포한 ‘부정부패와의 전쟁’은 곧 ‘레임덕과의 전쟁’이다. 임기가 3년 가까이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권력누수 현상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정교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제적 대응에 나선 측면이 짙다. 

이완구 총리가 대(對)국민담화에서 적시한 네 가지 척결 대상을 ‘정치적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 행간의 의미가 읽힌다.

‘방위산업 비리’와 ‘해외자원개발 비리’는 전임 이명박정부와의 차별화에 유용하다. ‘대기업 비자금’은 재계 길들이기로 비쳐진다. ‘공적 문건 유출’은 공직사회 기강을 잡겠다는 경고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데 반대할 국민은 없다. 그러나 민심은 싸늘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한 방도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령이 비리를 척결하겠다는데 집권여당의 중진 의원들이 나서서 비난하는 황당한 사태가 연출되고 있다. 새누리당 친이계 정병국 의원은 “누가 기획을 했는지 정말 새머리 같은 기획”이라며 원색적 표현으로 비난했다. 
일부 친이계 의원들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향후 국회에서 정부 추진안건을 모두 부결시키겠다”, “박근혜 정권은 하늘에서 떨어진 정권이 아니다”는 식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본질은 부정부패 척결이 아니라 친이계와 친박계의 권력투쟁 양상이다. 그러니 민심이 싸늘할 수밖에 없다.

‘대란대치(大亂大治)’가 아닐까.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은 부인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대란(天下大亂)이 천하대치(天下大治)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썼다. 

세상이 한바탕 큰 난리를 겪어야만 큰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출범 후 ‘큰 정치(大治)’를 하지 못했다. 새 정부 구성단계부터 반복된 인사 실패에다, 일부 진보진영의 대선불복, 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파문 등이 이어지면서 수습에만 급급했다.

부패와의 전쟁은 5년 임기의 반환점이 다가오면서 성과물 만들기에 초조해진 박근혜정부가 던진 승부수다. 밭을 갈아엎은 뒤 새로운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려는 시도다. 

사회전반에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조기 레임덕을 차단하고 국정운영의 추동력을 확보하기엔 사정정국 조성이 가장 효과적이다. 
적폐를 뿌리뽑고,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며, 나태해진 공직사회에 채찍을 가하겠다는 데 대놓고 반발할 명분은 없다. 재계 안에서도 투자심리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앓이만 한다.

박근혜정부가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고 집권 중반기 국정운영의 방향을 잡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완구 총리가 적시한 네 가지 척결 대상이 다른 모든 국정과제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걸까.

‘한국갤럽’의 3월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전 주보다 하락한 36%로 나타났다. 반면, 부정평가는 2%포인트 높아진 54%였다. 부정평가자는 부정평가 이유로 ‘경제 정책’(17%)을 먼저 꼽아 박 대통령 취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부정부패와의 전쟁 선포가 나오기 전인 둘째 주 조사보다 4%포인트 더 높다.

그밖의 부정평가 이유는 ‘소통 미흡’(16%), ‘복지·서민 정책 미흡’(10%), ‘공약 실천 미흡·입장 바뀜’(10%), ‘인사 문제’(8%), ‘세제개편안/증세’(7%), ‘국정 운영이 원활하지 않다’(7%) 등이 지적됐다. 다른 기관의 조사도 엇비슷하다. 

총리담화에서 ‘적폐’로 지목된 내용들은 없다. 
서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선 박 대통령이 소통을 강화하고 인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민심이 담겨 있다. 물론, 국민도 적폐 해소 필요성을 왜 느끼지 않겠는가. 긍정평가자의 긍정평가 이유 중엔 ‘부정부패 척결’이 전 주
보다 4%포인트 올라갔다. 그럼에도 전체의 6%에 그쳤다. 부패척결이 필요하지만 당장은 ‘민생’부터 챙기라는 메시지다.

부패와의 전쟁은 기왕에 시작했으니 김진태 검찰총장의 말처럼 신속히 환부만 도려내는 외과수술식 수사를 해야 한다. 

만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이곳저곳을 들쑤시면 ‘대치’는 못하고 ‘대란’만 일으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장의 ‘전·월세 대란’부터 잡아야 국민의 박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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