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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8 05:53
상상과 현실의 거리 사이
조회 수 1678 추천 수 0 댓글 0
연말이 되고 새해가 오는 그 즈음엔 여기저기 모임에 어울려 다니는 게 바쁘지 할 일이 많다거나 비즈니스 때문에 직장이 힘들거나 하지도 않는다. 나 같은 경우는 12월 중순까지 열심이던 작업도 잠시 접고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도 보고 쇼핑도 하러 다녔다. 크리스마스다 새해다 해서 시간에 상관없이 런던 중심가에서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어떤 사람들은 양손에 쇼핑가방 여러 개를 들고도 쇼윈도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대낮이지만 레스토랑이나 펍과 같은 따뜻한 공간 안에서는 친구, 혹은 가족끼리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년 중 가장 가족이나 지인들의 안부가 유난히 궁금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 지는 때가 바로 요즘이 아닌가 싶다. 바로 사람이 그리운 때이다. 그러나 꼭 사람만을 원하는 건 아니다. 혼자 하는 시간 또한 간절히 원한다. 조용히 생각을 좀 하고 한 해를 정리하며 새해에 대한 계획도 세우길 원하고,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을 벗어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하는 등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행복을 찾아 나선다. 이건 무슨 심리일까? 절대 외롭게 보내기 싫어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로 하는 마음. 이것은 또 다른 한 해를 맞으면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나의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 확인한 후 내 삶의 일부인 ‘나의 사람’들의 보면서 흐뭇해 한다. 그와 동시에 혼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혼자 즐길 줄 아는 대견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나간 한 해 속에 ‘나만을’ 위해 해야 했던 일 중 놓쳤던 것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 지난 주에는 그런 의미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밀린 책도 읽고 바빠서 옆으로 미뤄놨던 자료와 서류 등도 다시 정리하고, 봐야지 했던 영화들도 찾아보았다. 이래서 일년 주기가 필요한 가 보다. 나만을 위한 여유로운 시간을 적어도 한번은 가질 수 있게 하니 말이다. 난 <황금 나침반(The Golden Compass)>과 <행복>이라는 두 편의 영화를 보기로 했다. <황금 나침반>은 전 세계 1400만부라는 판매고를 올리고 세계 유명 대학에서 환타지 세계관에 대한 연구 논문이 많이 나올 정도로 작품성과 흥행 모두에서 인정받은 영국 작가 필립 풀먼의 베스트셀러 3부작 중 그 첫 번째이다. <반지의 제왕>을 만들어낸 뉴라인 시네마가 <황금나침반>을 3부작으로 영화화하기로 결정하여 신화, 모험, 역사, 판타지를 넘나드는 다양한 요소를 탄탄한 구성과 수준 높은 CG기술로 스크린에 그대로 펼쳐냈다. 또한 감독 크리스 웨이츠이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느꼈던 환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매혹적인 캐릭터,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이 넘치는 화면의 경이로움을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황금 나침반>을 본 후 한국영화를 골랐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행복>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등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니 영화의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이면서도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끔 하는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아픈 몸으로 만나 특별한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던 남자 영수(황정민 분)는 사업실패와 알코올 중독으로 돈과 건강을 잃고 도피처처럼 찾은 시골의 요양원에서 여자 은희(임수정 분)를 만난다. 불치병의 오랜 투병생활에도 불구하고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여자 은희를 알아가면서 새로운 삶을 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영수가 시골에서의 삶과 아픈 은희에 대한 지겨움이 찾아오면서 다시 도시생활을 목말라 하지 전까지는. 영화 <황금 나침반>과 <행복>은 전혀 닮지 않은 영화이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적 배경과 독특한 캐릭터와 시각적 흥미거리들을 가지고 관객에게 접근하는 <황금 나침반>과 달리 <행복>은 일상을 닮는다. 내가 한국의 문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정도로 그 분야에 대해 박식하진 않지만 감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는 대형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가 많지 않다.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나 불가능한 요소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적 특징을 대변한다. 우리에게는 ‘현실’이 중요하다. 영화를 보면서 스토리에 호응할 수 있고 영화 속 연기자들이 내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행복>은 ‘변치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 혹은 ‘사랑, 그 잔인한 행복’ 이라고 요약된다. “너 없으면 못살 것 같더니 이젠 너 때문에 미치겠어. 니가 먼저 얘기 좀 해줘, 헤어지자고…… ” 은희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은 영수는 마냥 행복한 은희와는 달리 둘만의 생활이 점점 지루해진다. 궁상맞은 시골 생활도,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병약한 은희도 부담스러워진 영수는 “이제 너 없으면 못살 것 같아.”라고 말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다. 지루하고 궁상맞은 사랑이야기 일 수 있으나 1시간 반의 짧은 영화 안의 이 슬프고 너무나 현실적인 그들의 사랑은 나를 슬프게 하고 눈물이 흐르게 했다. 얼마 전 제일 친한 친구가 한국에서 개인전을 한다고 팜플렛을 영국으로 보내줬다. 첫 장을 넘기면서 시작되는 시간이 흐르는 것에 관한 짧은 글에서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슬픈 사랑이야기 따위에 10대의 어린 소녀였을 때처럼 감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사랑이야기에서 현실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으로만 가득한 사랑이야기에서는 유치함을 느끼고 영화 <행복>처럼 너무나 현실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가슴이 미어지거나 슬픔을 느낀다. 가끔씩 보는 한국영화는 나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고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언어적으로 편안히 느낄 수 있는 공감도 있지만 그것보다 <행복>이라는 제목에서처럼 ‘과연 행복이 무엇일까?’와 같은 작은 질문을 마음 속에 던지게 된다는 것이 한국영화의 큰 장점이다. <황금 나침반>을 보면서 뛰어난 연출력과 빠르게 움직이는 화면처리를 보면서 감탄하고 창조된 캐릭터들을 보면서 신기해 했다. 또한 영화를 통해 소설 원작을 읽고 싶어지는 충동과 2편이 나오기 전에 책을 먼저 읽고 책을 통한 상상도 시도해 보고 싶어졌고, 주인공 라라가 살던 조던 대학의 배경지인 옥스포드가 다시 궁금해졌다. 영화 <해리포터>를 보고 난 후, 런던의 거리를 걷거나 기차를 탈 때 마술학교로 통하는 문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해리포터>나 <황금 나침반>은 내 영국생활에 작은 환상을 불어 넣어 준다. 새해에 두 영화 <행복>과 <황금 나침반>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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