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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빛깔, 독특한 풍미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차 한잔의 여유를 알게 되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조용한 음악과 함께 차 한잔을 옆에 두고 편한 나만의 공간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조금씩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길어지고 있어 따뜻한 집안의 기운이 더욱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조금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날카롭게 밀려드는 칼 바람이 몸에 닿을 때의 싸늘함은 방금 잎을 띄운 차 한잔의 온기로 날아가버린다.

영국사람들은 유난히 차 마시는 것을 즐긴다. 어쩜 내가 영국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처럼 영국의 자연과 문화적 특성 때문에 티타임이라는 것이 자연스레 영국인들의 몸에 배여 습관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날씨가 추워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집 안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온기를 느끼고, 어쩌다 햇빛이 비치면 그에 환호하면서 차 한잔을 들고 집 밖의 정원으로 나가 따뜻한 햇살을 받는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을 사랑하는 영국인들의 특성 또한 차를 마시는 여유가 그들에게 뿌리내리게 된 듯하다.

염혜숙씨가 쓴 <홍차와 영국>이라는 책을 보면 영국 여왕이 해외순방을 할 때면 늘 두 개의 가방이 준비된다고 한다. 둘 중 하나는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여 챙기는 혈액가방이고, 다른 하나는 홍차를 담은 가방이라고 한다. 이처럼 영국에서 홍차라는 것은 여왕에서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까지 어떤 신분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착한 오래된 문화이다. 이런 영국의 차문화도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간소화 되고 있는데, 간단해졌다고 하는 것이 하루에 서너 번을 마시니 옛날에는 차를 마시는 티타임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게 감도는 붉은 빛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 바로 홍차(紅茶)다. 부드러운 향과 약간 떫으면서도 혀끝에 감도는 독특한 풍미가 특징이다. 홍차는 일종의 문화적, 지적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홍차 한잔을 마시는 것은 생활 속에서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람들간의 따뜻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 (Jane Austen)의 소설 <오만와 편견>이나 <엠마>를 봐도 우아한 여주인공은 홍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러는 중에 서로에 관해 새로움을 알아가고 이해하려 한다. 이때 따뜻한 홍차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은 대화 중 생각의 시간을 만들어주거나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논쟁이나 다툼이 있었다면 차 한잔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차를 마실 때 꼭 누군가와 함께일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혼자서 창 밖을 가끔씩 바라보며 차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바쁜 생활 속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일터나 학교로 나가기 바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식사를 하고 TV난 컴퓨터 앞에 앉아 오로지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 전 책을 조금 읽는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이렇게 빡빡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 혼자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나만의 짧은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지금의 나처럼 차 한잔을 옆에 두고 글을 쓰는 것처럼 일을 할 수도 있으나, 해야 할 일들이나 TV, 컴퓨터와 같은 나를 위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그냥 조용히 소파에 앉아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

홍차는 우리에서 어떤 작용을 하길래 차 한잔을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까? 찻잎의 중요한 성분은 카테킨류의 폴리페놀(Polyphenols이라고 한다. 이는 차의 맛과 향을 결정짓기도 하지만 생리적 기능성분으로서도 많은 역할을 한다. 생잎의 강한 쓴맛이 산화되어 홍차로 되는 과정에서 약간 상쾌한 떫은 맛으로 변하는 것도 이 카테킨류의 산화 생성물과 카페인이 부가적으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건조한 찻잎에 20-35%가량 함유되어 있는 이 카테킨 때문에 인체의 생체조절 능력이 향상되며 따뜻한 온도와 홍차의 색깔, 그리고 향을 통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홍차의 종류에 따라 그 색과 향이 다르다. 홍차의 색깔은 밝은 오렌지색을 내는 테아플라빈(Theaflavin), 진한 홍색을 내는 테아루비긴(Thearubigin)이 산화중합한 적갈색 성분들이 혼합되면서 형성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잎에서 우러나오는 색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맛을 음미하는 것과 함께 홍차의 색변화를 보면서 시각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럼 향은 어떤가? 홍차에도 다즐링, 아삼, 우바 등과 같이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그 색뿐만 아니라 향이 다르다. 근데 사실 찻잎이 지닌 향기 성분은 적다. 하지만 차를 만드는 공정(工程)을 거치면서 풀내음을 내는 알코올 성분들이 10배 이상 증가하고, 이는 산화효소들에 의해 각각의 품종에 맞는 특별한 향을 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얼 그레이를 마시고 있다. 진한 오렌지 빛의 이 홍차는 베르가모트(Bergamot)향이 난다. 감귤류인 베르가모트는 다른 일반 홍차보다 향을 진하게 만들고, 그래서 홍차의 맛에도 영향을 준다. 잔을 들어올리는 순간 이미 얼그레이의 진한 향은 나에게 전해지고 몸 전체의 편안함을 얻게 된다. 실제로 베르가모트향은 머리를 맑게 하고 심신의 피로를 씻어내는 아로마와 같은 효과를 낸다니 나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인 듯하다. 따뜻한 홍차 한잔에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지친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니 홍차야말로 우리 생활 속의 훌륭한 벗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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