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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1 22:28
현대 미술은 정말 관객을 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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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은 정말 관객을 버린 것일까? Classified : Contemporary Art at Tate Britain 데이트 브리튼 갤러리/ 6월 22일 부터 8월 23일까지 20세기 피카소와 칸딘스키 이후 모더니즘 미술은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해지고 대중과 먼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다. 다시 미술의 기본 형식을 파괴한 다다이즘이 태동하면서 미술은 마치 미의 형식에서 멀리 떨어져 가버린 듯 인상을 주고 있다. 미술이 관객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관객이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미술은 사실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더욱 파고들었고 어느 시대보다고 가깝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시민들은 미술은 오로지 예쁘게 미술관 벽에 걸려 있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것들이 자기 옆으로 온 것임을 눈치 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 예술가들은 이젠 다양한 것들을 미적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흔히 주의 물건들을 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레디메이드)은 바로 더욱 친밀하고 쉽게 미의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대중들의 틀에 박힌 고정 관념은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대중들뿐만이 아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나타났을 때 대부분의 화상과 언론, 평론가, 지식인은 10년 후의 결과도 내다보지 못하고 이들을 통렬하게 비웃었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들고 <샘>이란 이름을 붙여 전시장에 설치할 때 그는 심사위원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조소와 냉소적 시각을 보냈으며 끝내는 인부들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의 작품은 50여년이 지난 후에 그 의미를 인정받게 된다. 기존의 물건들을 그대로 전시장에 끌어들인 레디메이드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선 이젠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주류적 현상이 되 버린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레디메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레디메이드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의미를 반의미로 전환>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예술성을 획득했다면 후자는<의미를 무의미로 전환>시키며 그 물체 자체의 현상적 미를 관중에게 <재발견>하게 한다. 다시 전기 포스트모던의 시대와 달리 90년대 이후 후기 포스트 모던시대의 레디메이드는 또 다른 얼굴을 갖고 대중들에게 나타났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새로운 레디메이드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그 현장의 모습을 바로 데이트 브리튼 (Tate Britain)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 큐레이터, Clarrie Wallis 와 Andrew Wilson에 의해 야심적으로 기획된 이 전시회를 그들은 Classified란 제목을 붙였다. 만약 이 큐레이터가 미술관에 작품으로 드러낸 의사를 읽을 수 있다면 그 새로운 의미를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큐레이터의 숨은 의도와 드러낸 의도를 전시 작품을 통해 읽는 것도 미술관을 방문 하는 또 하나의 기쁨이다. 현대 예술은 의미전달을 인상파 이전의 미술과 달리 관객들에게 직설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사변적 이야기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 느낌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마치 그 의미는 소풍날 숨겨놓은 보물찾기처럼 숨겨져 있다.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전시장을 둘러보자, 39개의 메트로놈(metronomes)이 각기 다른 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난해한 분위기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네 벽바닥에서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있는 메트로놈의 소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자. 그 소리의 간격과 틈과 전체적으로 뒤섞여 혼합된 음이 바로 작가가 관객에게 소리로 만들어 보이는 조형의 공간이다. 만약 메트로놈의 작가와 약간의 소통이 가능하다면 다음 Mark Dion의 작품인 방 한 구석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진열장 앞에 서 보자. 낯 선 진열장에는 버려진 유리병, 깡통, 뼈 조각, 녹슨 쇠붙이 등이 서랍과 유리 진열장을 꽉 채우고 있다. 서랍을 열어보면 사기 조각, 유리, 종이, 작은 뼈 조각 등이 분류되어 빼곡하게 차있다. 현대 미술에 친숙하지 않는 관객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예술이란 말인가? 어디까지 미술이 방황을 할 것인가? 대중들은 탄식하며 우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고 과거 시대에 죽어서야 겨우 인정받고 그림이 팔리던 것과 달리 소더비에서 거래가 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으로 수십만 파운드에 거래가 되는 미술품이다. 콘템포라리 미술이 주는 희열과 감동 Mark Dion은 1999년 테임즈 강변의 양쪽을 2회에 걸쳐 파헤쳐 그곳에서 나온 잡동사니를 수거해 분류해 전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레디메이드의 형식이다. 그것은 있는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에서 탈피해 직접 개입한 미디 움의 모습이다. 이것은 <분류 형식>과 <과정 process> 혹은 소통의 도구인 <미디움 medium>의 형식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Mark Dion의 진열장 앞에 서서 서랍들을 열어보자. 그리고 수천 개의 잡동사니를 조각들을 보면서 강변을 파헤쳐 그것을 모으고 다시 수집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진열장의 옆 한쪽 벽에 붙어있는 발굴 현장의 두 강변지도가 쉽게 상상력을 자극시켜 줄 것이다. 현대 미술은 구시대의 미술과 달리 미술 앞에 일정한 금지된 거리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깊숙이 끌어들여 <참여>를 유도하고 <개입>을 시킨다. 다음 방으로 들어서면 관객들은 더욱 어리둥절해진다. 바닥에 산악용 자전거와 황토 흙이 뒤 섞인 돌덩어리와 깨는 망치, 비커와 전기스토브가 어지럽게 놓여있는 탁자 그리고 그 옆에는 산소통과 간단한 주물 성형기가 있고 다시 틀이 놓여있다. 조명을 낮게 해 놓은 방은 마치 공장의 창고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당연 관객은 더욱 당황해지고 이 장난질이 예술인가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한 Simon Starling(1967)의 의도를 알면 머리가 시원해지며 콘템포라리 미술이 주는 전혀 다른 희열과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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