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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94년 가을, 지금은 폐관된,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영화광들의 추억 속에만 자리하고 있을 종로 2가의 예술/컬트영화 전문 상영관이었던 코아아트홀에 ‘중경삼림’이라는 한 편의 홍콩영화가 상영되었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으로 시작된 홍콩느와르의 르네상스를 거쳐 주성치의 도박영화를 끝으로 자멸해버린 홍콩영화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이 작품은 당시 막강했던 임청하 신드롬, 매력남 금성무의 재발견, 왕정문이라는 천재배우의 발굴,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시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세 번째로 소개하는 왕가위 감독을 만나게 해준 소중한 작품이었다. 홍콩의 구석구석을 때로는 화려한, 때로는 쓸쓸한 조명으로 비추며 핸드헬드(Hand-Held, 촬영기사가 카메라를 직접 들고 이동하며 촬영하는 기법) 촬영을 사용, 영화 속 주인공들의 심리가 가슴 깊이 느껴지는 화면과 각 장면의 감동을 극대화시킨 음악,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도시인의 고독과 홍콩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단상… 성공한 장르에 대한 삼류 아류작의 홍수와 홍콩스타의 부재,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의 막강공세에 눌려 한 동안 영화다운 홍콩영화를 맛보지 못했던 관객들은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흡입력으로 액션과 도박이 아닌, 또 다른 이야기, 그것도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그려나간 이 작품에 열광하면서 한동안 왕가위 신드롬을 이어갔다.

1958년 7월 17일 중국 상해 출생한 왕가위 감독은 홍콩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 후, TV 드라마 일을 하다가 1998년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열혈남아’(원제는 江湖龍虎門, 최근 설경구가 주연한 우리영화 ‘열혈남아’는 사실 이 영화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다)라는 작품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유덕화와 장만옥이라는, 비교적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당시 국내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던 주윤발과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느와르의 한 작품으로 묻혀졌지만 사실 이 작품은 의리와 액션을 강조한 여타 홍콩느와르와는 분명 다른 영화였다. 즉, 홍콩 뒷골목 청년들의 허무를 통해 장차 중국반환을 앞둔 홍콩의 불확실한 미래, 홍콩이라는 도시가 지닌 고독과 허무라는 왕가위 감독의 주제의식이 시작된 작품이며, 그의 이러한 주제의식과 홍콩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후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다.

이후 연출한 ‘아비정전’ 역시 홍콩에 대한 그의 주제의식을 담아낸 작품으로 당시 국내 영화평론가나 영화 전문지들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여전히 ‘홍콩영화=액션&도박&코미디’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관객들에게는 그저 지루한 영화일 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4년 다소 독특한 스타일의 무협사극 ‘동사서독’을 선보인 뒤, 택동(澤東)이라는 영화사를 직접 설립, 광각렌즈와 핸드헬드 기법을 이용하여 빼어난 영상미를 선보인 ‘중경삼림’으로 14회 홍콩 금장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고 주연배우 양조위는 남우주연상 수상, 흥행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수많은 왕가위 매니아를 탄생시킨 작품으로 비평, 흥행 양면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내러티브 보다는 영상미와 음악으로 관객들의 감성을 사로잡은 말 그대로 ‘왕가위 스타일’은 비주얼 세대로 접어들던 당시 젊은이들을 매료시켰고, 도시인의 고독과 허무, 그 가운데 피어나는 일상을 통한 의사소통은 여타 영화들에서는 보기 힘든 그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왕가위를 이야기 하려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크리스토퍼 도일(중국이름: 두가풍) 촬영감독이다. 1990년 ‘아비정전’ 이후 그는 왕가위의 모든 작품을 촬영했으며, 이외에도 ‘첨밀밀’이나 ‘영웅’, ‘무간도’ 같은 대작들도 촬영한 현존하는 홍콩영화계 최고의 촬영감독이다.

이후 1995년 ‘중경삼림’과 다소 비슷한 톤으로 그려낸 작품 ‘타락천사’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15회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촬영상, 여우조연상 수상.
그리고, 드디어 1997년 ‘해피 투게더’를 통해 깐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깐느영화제 감독상이라는 큰 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적으로 그 지명도를 높였다. 이제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2000년대에 들어서도 ‘화양연화’와 ‘2046’과 같은 작품으로 여전히 ‘왕가위 스타일’을 고수하며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도시인의 고독과 허무, 홍콩의 암울함과 희망, 오렌지톤의 조명과 핸드헬드 기법, 올드팝의 삽입 등 그의 작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왕가위 스타일’을 벗어나지 않고 있어 때로는 지나친 집착이 아니냐는 혹평도 있지만 홍콩이라는, 독특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을 통해 그려내는 그의 영상세계는 분명 그를 이 시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으로 뽑는데 주저할 수 없도록 하는 매력과 힘을 가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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